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KBS2 월~금 밤 9시25분)와 <안녕, 프란체스카>(MBC 월 밤 11시5분)가 시청자들의 호평 속에 조용하지만 힘찬 인기몰이를 시작하고 있는 가운데 ‘시트콤의 귀재’ 김병욱PD가 돌아왔다. 여기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경림의 복귀작임이 알려지면서 <귀엽거나 미치거나>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다.
벌써부터 <귀엽거나 미치거나>의 흥행 여부에 따라 시트콤 부흥기였던 2000년대 초가 재연될 것 같다는 예상을 하는 이들마저 생겨났다.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로 시트콤의 새 지평을 연 김PD기에 이런 예상이 그리 틀린 일은 아니지만, 정작 본인은 ‘부담스럽다’는 눈치다. “사실 저는 진짜 ‘그냥 웃겨보겠다’는 생각 외엔 잘 안 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해주시니 저로썬 당연 부담스럽죠.(웃음) 다만 너무 상투적이어선 안 되겠다 싶어서 결말 부분은 참 많이 고민해요. 하지만 그나마도 오래 하다보니 상상력을 벗어나기 힘들더라고요.”
그는 작품의 질을 돌보지 못한 채 앞으로만 나가야 했던 일이 부담스러워 2003년 <똑바로 살아라>를 끝으로 “시트콤은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 또다시 시트콤 <귀엽거나 미치거나>를 들고 대중 앞에 섰다. 그리고 쉬면서 생각해보니, ‘게으른’ 자신에겐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고, 또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건 역시 시트콤이라는 결론이 서 다시 시트콤으로 복귀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가 잘하는 ‘김병욱표 시트콤’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점이다. 결코 오버하거나, 개인기에 의존하지 않는 인물들이 빚어내는 페이소스는 저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공감을 자아내 많은 마니아를 양산했다. 그런데 2005년의 그는 캐릭터가 아닌 ‘스토리’를 강조한 시트콤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쉬는 동안 <발리에서 생긴 일>과 <파리의 연인>을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이들 드라마에서 내러티브가 갖는 힘을 알게 됐죠. <똑바로 살아라>까지 오면서 한계(너무 현실적이고, 시니컬한)를 느끼던 차에 우리도 내러티브가 강한 작품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라며.
김PD의 이런 용기-스타PD로서 새로움에 도전하는-는 요즘 나온 몇몇 시트콤과 드라마에서 받은 ‘감동’과 ‘충격’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코미디는 어느 선에 가면 (어디서 시작했든) 서로 만나게 돼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두근두근 체인지>와 <안녕, 프란체스카>를 보면서 많이 배웠죠. 사실 저처럼 어릴 적에 만화도 안 보고 자란 (그래서 시니컬할 수밖에 없는) 사람만의 방식이 있잖아요. 삭막한 현실을 절대 저버릴 수 없는. 헌데 <두근두근 체인지>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어떤 내공이 느껴지더라고요. 현실과 반대에 서니 저렇게 다른 발상이 나오는구나 싶어서 참 새로웠어요. <발리에서 생긴 일> <파리의 연인>을 패러디 해보자는 용기도 생겼죠.”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주간 시트콤 <귀엽거나 미치거나>다. 때문에 <귀엽거나 미치거나>에서는 더 이상 기승전결의 마지막에 피어나는 기막힌 반전을 구경할 수 없다. 김PD는 “그 대신 커다란 줄기(스토리) 속에서 튀어나오는 예상 밖의 이야기들이 생각보다 웃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존 드라마의 전형적인 스토리를 살짝 비틀었을 때 색다른 재미가 느껴진다며. 그가 말한 <귀엽거나 미치거나>의 웃음은 경림과 사랑에 빠진 맘보제과의 셋째 아들 김민혁이 아버지를 설득하러 갔지만, 드라마에서처럼 아버지와 멋진 담판을 짓는 대신 무서운 아버지 앞에서 아무 말 못 하고 도망쳐 나온다는 식이다. <파리의 연인>의 명장면, ‘수영장 신’도 패러디됐다. 하지만 이는 미술관장 김수미와 아르바이트생 소유진 사이에서 벌어지고 만다. ‘애기야’도 마찬가지. <귀엽거나 미치거나>에는 인기 드라마의 전형성이 기어이 깨지고 만다.
여기에 기존의 이미지와 정반대로 바뀐 박경림과 소유진을 감상하는 것도 <귀엽거나 미치거나>의 또다른 재미다. “서민적 이미지가 강한 박경림을 (얼굴 빼고)모든 걸 갖춘 전문직 여성으로 만들면 재밌겠다 싶었어요. 소유진은 시트콤을 굉장히 잘할 친구예요. 이번에 그의 여우 같은 기존 이미지를 바꿔볼 참이에요. 물론 아직은 서로 낯설어서 힘들 거예요.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금방 익숙해질 거라고 믿어요.”
그의 이런 시도는 분명 반길 일이다. 하지만 많은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 그의 시트콤이 갖는 진정한 힘은 우울하고 때론 초라한 캐릭터들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웃으며 사는 법을 알려주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김PD 스스로도 “매회 이야기의 변화가 커서 전같이 안정적이진 않을 것”이라며 “걱정되는 새로운 시도”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니 <귀엽거나 미치거나>가 스타PD의 명성을 이어줄 새로운 작품이라고 바로 단정짓는 것은 조금 섣부른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PD가 있는 한 <귀엽거나 미치거나>엔 희망이 있다. “사람들을 ‘쿨하게’ 웃기는 게 제 목적이긴 하지만,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나 <똑바로 살아라>의 끝을 보면 제게 일상을 바라보는 관조적인 시선이 항상 있는 것 같아요. 결정적인 순간이면 신나게 웃고 있다가도 제 자신으로 돌아오더라고요. 그래서 꼭 마지막 회가 아니더라도 제 시트콤을 보고 씁쓸해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거기에 저의 본질이 있는 것 같아요. 유쾌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삶에 고민이 많은 이들도 있잖아요. 저는 더 심한 경우고요. 저의 그런 심정이 본능적으로 나타는 것 같아요.” 이런 김PD라면 실컷 웃고 난 뒤 찾아오던 삶의 공허함을 <귀엽거나 미치거나>에서도 분명 표현해낼 것이므로. 김병욱PD에 의해 새롭게 태어날 박경림은 어떤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킬까, 소유진의 바보스러움은 또 어떤 웃음을 안겨줄까. 벌써부터 기대된다.
<귀엽거나 미치거나>로 돌아온 박경림
“바뀐 제 모습, 연기로 보여드릴게요”
<귀엽거나 미치거나>의 중심에는 분명 김병욱PD가 있지만, 이 작품을 2년 만의 방송 복귀작으로 꼽은 박경림도 화제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오프라 윈프리 같은 진행자가 되고 싶다는 그가 시트콤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귀엽거나 미치거나>를 통해 본 미래는 또 무엇이었을까.
-복귀작으로 <귀엽거나 미치거나>를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나
=많은 분들이 제가 유학까지 갔다 와서 얼마나 변했나, 궁금해하실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변하면 얼마나 변했겠나. 쇼 프로그램에 나와서 웃고 떠드는 걸로는 그간의 변화를 보여드리지 못할 것 같아서 연기를 선택했다. 미국에서 배운 게 연기이기도 하고. 이렇게 차근차근 활동을 할 계획이다.
-그렇다면 <귀엽거나 미치거나>는 진행자가 되고 싶은 당신 인생 계획의 한 과정인가.
=꼭 그건 아니다. 내 이름을 건 토크쇼를 진행하기엔 아직 부족한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토크쇼라는 것이 진행만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연기력과 유머도 갖추고 싶었다. 사실 출연에는 1년여 동안 내 캐릭터를 연구했다는 김병욱PD에 대한 믿음도 컸다.
-<혼자가 아니야> 후속이다. 부담되진 않나.
=정말 부담되죠. 좀 곤란하기도 하고. 사실 저는 <귀엽거나 미치거나>가 <혼자가 아니야> 후속인 걸 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저랑은 일일시트콤으로 계약을 했거든요. 그런데 SBS 안에서 편성이 바뀌고 하면서 그렇게 됐더라고요.
-미국 필름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연기를 배웠다고 들었다. 달라진 점이 있나.
=좀 더 신중해졌다. 옛날에는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무기로 무작정했는데, 지금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 액션 하나하나를 계산하게 된다. 아, 이건 꼭 말하고 싶은데, 우리나라는 유독 시트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것 같다. 하지만 코미디 연기는 대선배 중에서도 정말 연기를 잘하시는 분들만 할 수 있다.
-기존의 이미지와 매우 다른 캐릭터라고 들었다. 능력 있고, 교양도 있고 등등. 어색하진 않았나.
=저보다 보시는 분들이 힘들겠죠.(웃음)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울까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 캐릭터가 아주 심하게 바뀌는 건 아니에요. 큐레이터라는 직업 때문에 좀 ‘고상해’ 보이는 거지. 저라는 아이의 성격은 비슷해요. 그래서 제목도 <귀엽거나 미치거나>에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