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서면 인터뷰
2005-03-03
정리 : 김수경
“당신도 오래 살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보스턴, 시카고, 플로리다, 피닉스, 샌디에이고, 시애틀, 댈러스, 캔자스, 뉴욕. 어느 록 밴드의 전미 투어 일정을 연상시키는 이 명단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주요 상들을 차지한 영화비평가협회들이다. 물론 전미비평가협회, 골든글로브도 예외없이 기립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벌써부터 또 다른 거장 마틴 스코시즈의 아카데미 감독상 도전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흉흉한 예측도 공공연하게 나도는 중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리우드에서 75살의 나이로 현역감독 겸 배우로 활동하는 것, 그 존재만으로도 경의를 표할 만하다. 심지어 만들어내는 영화의 내공은 무협지에 나오는 한 문파의 장문인처럼 갈수록 높아져만 간다. 인터뷰 안 하기로 소문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아카데미를 코앞에 두고 서면 질문지를 보냈을 때는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노회한 거장은 자신이 만들어낸 영화의 깊이만큼 꼼꼼한 답신으로 질문에 응해 시름을 덜어줬다. 냉소적인 눈빛을 지닌 총잡이, 굳은 표정의 무정한 형사였던 그가 화면 속에서는 은발이 듬성듬성한 복싱 트레이너로, 화면 밖에서는 영화의 거장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신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인생.

-영화의 결말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 책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결말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도 영화로 만든 데는 주인공의 선택에 동의한다는 뜻일 것 같다. 때문에 당신을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보는 사람에겐 충격적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해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미스틱 리버> 이후 정말 수많은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3년 전쯤 읽었던 <불타는 로프>의 짧은 이야기를 소재로 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폴 해기스의 각본은 원작보다 더 좋았다. 이 작품을 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근원적인 문제의 갈등이었다. 삶의 불확실성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대처방안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실제 삶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와 영화 속 캐릭터들의 행동방식은 확실히 다를 수 있다. 모든 이야기에는 ‘가정’이란 게 있으니까.

-당신 영화의 주인공들은 과거에 깊은 상처를 가진 인물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당신이 영화에서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지와 관련된 걸로 보인다. 현재의 어떤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과거에서 자유롭지 않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영화를 보는 동안 프랭키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그런데 영화에선 모든 걸 자세히 보여주진 않는다. 프랭키가 딸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만 보여줄 뿐이다. 짐작할 수 있지만 생략함으로써 영화에 깊이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다. 덜 보여줌으로써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관객의 상상력에 많은 부분을 부여하고 싶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초반에 관객은 자신들에게 자문할 것이다. ‘프랭키와 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을까?’ 그건 우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가족 내의 문제, 즉 나쁜 형태의 이혼일 수도 있고 젊은 시절에 복싱에 너무 미쳐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한 추측은 관객이 결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미스틱 리버>에서 모두들 ‘케빈 베이컨이 그러는 이유가 도대체 뭐지?’라고 궁금해 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책처럼 꼬집어서 설명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관객이 이것저것 생각하며 즐기는 게 좋다. 그게 관객의 할 일이니까.

-앞의 질문과 관련해서 프랭키의 과거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게 있다. 프랭키와 딸은 어떤 관계인가? 프랭키는 과거에 왜 마지막 시합에서 스크랩의 고집을 꺾지 못했을까? 성당에서 해답을 얻지 못하는 데도 프랭키가 계속 성당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크랩의 과거에 관해 언급하자면, 스크랩은 아마 해서는 안 됐던 경기, 그러니까 자신의 능력보다 버거운 상대와 시합했을 것이다. 프랭키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경기를 중단시키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그가 스크랩의 매니저가 아니었기에 그러지 못했을 테고. 프랭키는 아이리시 가톨릭 신자이며, 가족문제뿐 아니라 종교에도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는 젊은 신부가 그의 오랜 고통에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냉소적인 질문과 논평에 대한 신부의 반응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그는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다. 매기를 만난 것이 날카로운 전환점이 되고, 두 사람의 조우는 프랭키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영화에 나오는 매기의 가족은 사악해 보인다. <미스틱 리버>에 등장한 가족의 모습과 다른 면이기도 하다. 가족의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는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쟁점이 됐던 문제라고 알고 있다. 당신은 일방적으로 가족의 소중함을 찬양하는 영화들을 비판하는 것 같다.

=내게 있어 가족은 기쁨과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러나 모든 가족은 오랜 세월을 함께 하다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좋은 순간과 나쁜 순간을 모두 겪을 수밖에 없다. 프랭키가 딸과의 관계로 고통스러워 했던 것처럼, 매기에게 가족은 일종의 장애물일 수 있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아픔이든 유머든 현실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프랭키와 매기의 관계는 일종의 대안가족이다. 그들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딸로 등장한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고독한 아버지와 가족에게 헌신하는 고독한 딸이 만나는 셈이다. 현대사회에서 진정 소중한 사랑은 그런 식으로 생긴다고 보는 건가.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단순한 복싱 이야기가 아닌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것을 아버지와 딸의 러브스토리로 생각했다. 영화에서 매기는 아내와 딸을 그리워하는 프랭키에게 딸이 되었고, 프랭키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버린 그녀에게 아버지가 되었다. 그들은 시대를 벗어난 인물들이다. 나는 이 영화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만들고 싶었다.

-당신은 젊은 시절부터 스타였다.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배우로서 당신이 보여준 연기가 매우 독특했다는 것이다. 격렬한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이었고 감독을 하면서도 그런 연기 패턴을 유지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연기는 차분하지만 에너지가 끓어오른다. 그런 연기 자체가 당신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느껴진다.

=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성숙해지는 특별한 이야기들을 찾는다. 1980년대는 내게 있어 전환의 시기였고, 1990년대는 퍽 근사했다. 왜냐하면 내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용서받지 못한 자>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선에서>처럼 후회와 문제를 갖고 있는 나이 든 사람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퍼펙트 월드>는 계획에는 없었지만 케빈 코스트너가 조언해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튜디오가 갖고 있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나를 따라왔다. ‘성숙한 남자’를 위한 역할이었다. 그런 역할이 이제 없다고 생각할 때면 갑자기 하나가 튀어나온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그런 예이다. 대단한 딜레마를 넘어서야 하는 인물이다. 그런 좋은 역할이 나를 부르면 캐릭터의 그림자 속에 스스로를 숨긴다.

-처음 연출을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배우로서 어떤 한계를 경험한 때문인가? 감독이 되기로 결심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감독이나 영화가 있는지 궁금하다.

=장르영화들- 서부극과 형사물- 을 하면서도 특정한 것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낀 시간이 있었다. 세르지오 레오네와 작업했을 때도 그와 보낸 시간은 너무 즐거웠고 인생에서 기억될 벅찬 시기였지만 역시 다른 것을 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그뒤에 돈 시겔과 <더티 하리>를 했고, 다음에는 그것을 그만둬야 할 때가 왔다. 그런 뒤에 <무법자 조시 웨일즈>나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차후에 자신의 생각을 갖고 그 장르들을 다시 찾아갔다. 나는 장르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다른 시점마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갔다.

-당신이 캐스팅하는 배우들은 할리우드 최고의 연기파라고 할 만하다. 대신 당신은 줄리아 로버츠나 톰 크루즈 같은 배우들과 작업한 적은 없다. 당신이 사랑하는 배우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나는 프로페셔널한 배우들이 보여주는 직업의식에 진정으로 많은 경외심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힐러리 스왱크는 촬영 전 3개월 동안 이 영화에 적합한 몸과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고된 훈련과 식이요법을 꿋꿋하게 견뎌냈다. 나는 그녀의 자질을 좋아한다. 그녀는 예쁘지만, 할리우드의 인기있는 여타 젊은 여배우들과는 다르다. 그녀는 성격파 배우의 얼굴을 가졌다.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정말 놀라웠다. 그녀는 내가 경험한 어떤 젊은 여배우보다도 훌륭한 직업의식을 가졌다. 그녀는 준비된 배우다. 이러한 직업윤리와 자신의 재능을 맘껏 표현할 준비된 배우들과 작업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놀라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젊은 시절부터 스타로서 살았는데 어떻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정서와 실생활을 그처럼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가 하는 거다.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된 비결을 하나 알려줄 수 있나.

=당신도 오래 살다보면 곧 다른 사람들이 처한 여러 가지 문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영화창작의 비밀을 알려준 영화를 꼽으라면 어떤 영화를 들 수 있을까?

=글쎄, ‘그건 비밀’이라고 답하겠다.

번역·사진제공 시네와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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