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뉴저먼시네마의 심장과 만나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회고전
2005-03-07
글 : 홍성남 (평론가)
3월8일부터 3주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회고전’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

장장 15시간에 달하는 TV시리즈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긴 시나리오를 쓰던 과정에 대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작업을 하는 데에는 비정상적이게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일을 꼬박 일하고 나서는 24시간을 잤고, 그런 다음 다시 4일 내내 일하곤 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도 평소와는 다른 그런 리듬 속에 빠져들게 된다.” 파스빈더가 한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가 얼마나 영화작업에 대한 강박 혹은 열정을 갖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삶 자체가 그의 영화(만들기)와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는 데 대한 하나의 사례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스빈더라는 인물이 대략 13년여 되는 그리 길지 않은 활동 기간 동안 무려 40여편의 영화들을 쏟아낸, 단지 다산의 영화작가가 아니라 삶 속에 영화를, 아니 차라리 영화 속에 삶을 철저히 융합시키려 했던, 그렇게 해서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시네아스트였음을 알고 나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파스빈더가 만들어낸 독특한 세계, 그것에 대해, 독일 영화사에 특히 정통한 영화학자 토마스 엘새서는 “악순환의 영화”(cinema of vicious circles)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줬다. 그런 이름에 걸맞게도 우리는 파스빈더 영화 속에서 권력 행사와 공모 혹은 동조의 역학관계를 자주 보게 된다. 사회가 원치 않아 후미진 곳에 존재하는 파스빈더의 계급적, 성적 아웃사이더 인물들은 단지 사랑만이라도 간절히 원하고 그것에서 무언가 구원의 길을 발견하려고 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 제목처럼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고 보는 그는 다른 ‘무책임한’ 멜로드라마들이 설파하는 것과는 달리 비정하게도 사랑이 궁극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파스빈더가 보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어떤 관계에도 지배와 억압의 메커니즘이 들어서게 되는데, 사랑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관계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결국 사랑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감정이란 것은 ‘착취’의 관계를 형성하고 정당화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파스빈더의 세계를 관통하게 된다. 그것은 퇴폐와 절망의 색채로 칠해져 보는 이들의 감정을 깊숙이 파고드는 세계이면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롤라>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좀더 큰 컨텍스트의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관객에게 이성의 작동을 멈추지 말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파스빈더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 이제 잠깐이라도 꼭 짚어야 할 것은,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앞에서 썼던 것과 같은 텍스트 내부에 대한 이해만으로 그 세계에 대한 조망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파스빈더의 세계에 부여된 ‘악순환’의 명칭은, 파스빈더와 그에게 착취를 당했던 조력자들 혹은 연인들, 그리고 파스빈더와 그의 경멸의 대상이면서도 보조금 등의 형태로 작업활동을 도와줬던 국가 사이의 억압과 동조의 관계까지 시선을 확대해서 바라보아야 정당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고나서야 파스빈더의 세계가 영화 사상 얼마나 독특했던 것인지가 좀더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텍스트 안팎으로 열정과 절망, 시적 낭만주의와 역겨운 퇴폐주의가 혼융되어 만들어진 그 세계는 당연하게도 중립의 시선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파스빈더가 죽기 전까지 만들어지던 그것에 대해 누군가는 열렬히 찬사를 보냈고 누군가는 고개를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이 카메라를 가지고 섹슈얼리티와 현대사회의 조건과 역사의 유산 등을 참으로 질기게 탐구했던, 세계 영화사의 한 중요한 유산임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회고전

일자: 3월8일(화)~31일(목) | 총 24일간
장소: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주최: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주한독일문화원
후원: 영화진흥위원회, 루프트한자, 밀레니엄힐튼호텔
문의: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02-743-6003 | 서울아트시네마 02-720-9782 www.cinemathequeseou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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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소개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

파스빈더 영화 세계의 본격적인 첫걸음은, 마치 장 뤽 고다르의 데뷔작을 연상시키듯 할리우드식 범죄영화의 틀을 빌려오면서 그것을 자기 식으로 소화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파스빈더의 장편 데뷔작인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는 두 남자와 한 여자가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을 대단히 냉정하고 무심한 듯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범죄영화의 외양을 띠면서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범죄영화로부터 기대하는 만족감을 완강히 거부하는 탓에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관객의 격한 반발에 부딪혔지만(게다가 기술적 실수도 몇번 보인다) 첫 작품을 만드는 감독의 모험심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적용해서 생성해내는 양식적 추상에의 의지와 극도로 황량한 시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는 초기의 파스빈더가 장 마리 스트라우브로부터의 영향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냈는가를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된다.

<왜 R씨는 미쳐 날뛰는가?>

파스빈더가 미하엘 펭글러와 함께 만든 <왜 R씨는 미쳐 날뛰는가?>는 어떤 면에서는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 같은 ‘도그마 영화’를 훨씬 앞서서 대부분 카메라를 들고서 오랫동안 찍은 화면들 안에다가 ‘사건’이라고 불릴 게 거의 없는 무료한 중산층의 일상을 담는다. 사실 어떤 이들이 보기에 영화의 80분간은 극도로 따분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작가의 거의 아무런 개입도 없다는 듯이 건축회사에서 일하는 주인공 R씨가 직장에서 일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 등과 같은 삶 속의 단편들을 지켜볼 뿐이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영화 속 인물과 마찬가지로 관객도 따분함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영화는 R씨의 갑작스럽게 미쳐버린 모습을 통해 시간상으로는 짧지만 감정적으로는 꽤 둔중한 충격을 안겨준다. 비록 제목과 달리 영화는 R씨가 왜 미쳐 날뛰는지 그 이유를 파고들진 않지만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내재한 공허함만은 훌륭하게 포착해낸다.

<성스러운 창녀에 주목하라>

1970년에 파스빈더는 스페인에서 <화이티>라는 영화를 찍었는데, <성스러운 창녀에 주목하라>는 바로 그 경험을 스크린 위에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파스빈더식의 <경멸> 혹은 <아메리카의 밤>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영화 만들기에 대한 자기반영적인 영화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의 한 해변 호텔에 영화 스탭들과 배우들이 영화작업을 하기 위해 모여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영화를 만들려 하기보다는 그걸 핑계로 노닐거나 욕구를 만족시키려 모인 사람들처럼 보인다. 촬영장은 진지한 작업에 대한 열기가 아니라 농탕질, 욕망과 질시의 시선, 고함소리로 가득하다. 집단작업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고 창조의 과정은 그리 고상한 것이 아니다. 그같은 자기 조롱의 시선을 통해 파스빈더는 영화를 만든다고 하는 성스러운 몸팔기에 들러붙은 낡은 신화를 스스럼없이 탈색시켜버린다. 그러면서 영화 속 영화감독이 만들려 한다는 “잔혹함에 대한 영화”를 그 스스로가 만들어버린다.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

언젠가 파스빈더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만나서 관계라는 것을 형성할 때마다 그것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파스빈더가 자신의 희곡을 스크린에 옮겨놓은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은 파스빈더의 그런 세계관을 잘 구현하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야기는 조수 겸 하녀인 마를레네와 함께 살고 있는 성공한 디자이너 페트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오만한 주인공은 모델이 되려고 하는 젊은 여인 카린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로부터 깊은 실연의 상처를 받는다.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은 사랑한다는 것을 매개로 형성되는 지배와 복종의 역학에 대한,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우면서 우아한, 그래서 더욱 비통한 영화들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한 작품일 것이다. 파스빈더는 그 파괴적인 사랑 이야기를, 마를레네가 치는 타자기가 신경을 건드리고 화려함과 폐쇄감이 절묘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페트라의 아파트, 단 하나의 공간에서만 전개한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연극적 방식을 가장 잘 활용한 영화들 가운데 하나로도 꼽을 만하다.

<폭스와 그의 친구들>

진심어린 사랑의 배반이란 익숙한 파스빈더적 주제를 다루는 <폭스와 그의 친구들>은 그 이전에 만들어진 파스빈더의 또 다른 대표작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의 남성판처럼 보이는 영화다. 영화는 ‘폭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프란츠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자리를 잃은 그는 복권에 당첨되어 큰돈을 손에 쥐게 된다. 그는 몰락 직전에 놓인 자본가의 아들 오이겐과 사랑에 빠지지만 둘 사이에는 사랑으로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이 놓여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폭스와 그의 친구들>은 동성애라는 소수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계급(차이)에 대한 영화라고 보는 게 옳다. 예절과 취향 등에서 프란츠와 오이겐이 만날 수 없는 것은 그런 차이를 계급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에 영화는 프란츠를 자본주의 사회 메커니즘의 희생자로 바라본다. 그런 프란츠(혹은 폭스)에게는 친구들이란 있을 수 없다. 죽어서까지 착취의 대상이 되는 프란츠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이 쉽게 지울 수 없는 씁쓸한 여운을 남겨준다.

<사랑만이라도 해줘>

파스빈더에게 TV용으로 만든 영화 <사랑만이라도 해줘>의 착상을 제공해준 것은 한 살인자에 대한 인터뷰였다. 하지만 그것을 토대로 파스빈더는 어린 시절 부모가 없이 자라다시피 한, 그래서 제목처럼 사랑만이라도 간절히 원했던,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과 로베르 브레송의 <돈>을 슬쩍 끼워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파스빈더의 이 영화는 부모에게 집을 지어주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젊은 노동자의 이야기를 나직하면서도 슬픔을 간직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주인공 페터는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만을 가졌지 사랑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 인물의 이야기를 거쳐서 자신의 고백을 토로하면서 파스빈더는 은밀하게 동시대 삶의 황폐함을 드러내준다.

<악마의 양조법>

<성스러운 창녀에 주목하라>가 관능과 퇴폐, 신경증, 그리고 권태가 이상하게 뒤섞인 분위기 안에서 기능을 상실한 집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라면, <악마의 양조법>은 그것과 유사한 주제를 다루되 히스테리와 그로테스크의 강도를 훨씬 높인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루이스 브뉘엘식으로 만든 파스빈더의 영화라고도 표현할 만한 이 영화는 파스빈더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아마도 가장 혼란스럽고 무정부주의적이며 괴상한 영화로 꼽아도 무방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른바 ‘혁명 시인’이라고 알려진 크란츠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쇄의 논리도 없이 시끌벅적하게 펼쳐진다. 그는 매춘부를 인터뷰해서 책을 출간할 생각을 하고 친구의 부인과 성관계를 맺고 갑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한다. 너무도 부조리해서 초현실주의적이라고 여겨질 이 악취미의 코미디는 파스빈더가 활력과 유머를 가질 때 어떻게 영화가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중국식 룰렛>

비유하자면, <중국식 룰렛>은 파스빈더식으로 만들어진 <게임의 규칙>이다. 어느 한적한 별장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서로 공격받고 파괴되는 이야기가 당연히 장 르누아르의 영화보다는 좀더 잔인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부유한 사업가인 크리스트와 그의 부인은 각자 내연의 연인을 데리고 서로에게 알리지 않은 은밀한 여행을 떠나지만, 딸 안젤라의 계략에 걸려들어 같은 장소에 도착하고 만다. 그때부터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위선, 악의, 이기주의 등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잔인한 게임이 펼쳐진다. 무엇보다도 <중국식 룰렛>은 파스빈더 영화들 가운데 형식적으로 가장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끊임없이 움직이는 카메라워크를 통해 관계의 미세한 추이를 드러내는 솜씨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13월인 어느 해에>

영화 속에서 이야기되듯,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는 이들이 심각한 심적 좌절을 겪는 해들 가운데 하나인 1978년은 아르민 마이어가 자살한 해였다. 그는 파스빈더의 연인으로서 그와 함께 살았고 그의 영화에도 출연했던 인물이었다. <13월인 어느 해에>는 그 비극적 연인을 추모하기 위해 파스빈더가 만든 영화였다. 영화는 원래 에르빈이란 남자였다가 성 전환 수술을 받은 뒤 엘비라가 된 주인공이 겪는 뼛속 깊이까지 스며 있는 고독을 다룬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잔인함과 그로테스크함이 표백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그것을 매만지는 파스빈더의 진심과 깊이가 묻어 있어 영화는 굉장한 정서적 흡인력을 행사한다. 고독의 문제를 실존적 허세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란 측면에서 제대로 들여다볼 줄 아는 이 영화에서 파스빈더는 감독, 각본, 편집, 미술, 촬영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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