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왔다. <펄프 픽션>의 우마 서먼에게 빌려온 듯한 가발에 자극적인 주황색 운동복을 입고, 녹슨 낫을 든 그 모습이 외계인 같다. 여운계, 김을동, 김수미. 점잖고 당당하며 인자했던, 안방극장의 마님들이 <마파도> 포스터를 위해 기꺼이 망가진 것이다. 마파도를 지키느라 동분서주했던 이들은, 최고의 지성 회장댁으로, 여장부 여수댁으로, 신기어린 욕쟁이 진안댁으로, 그간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변주한 캐릭터를 맡아 지난해 여름을 뜨겁게 불태웠더랬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한때 멜로물의 주연급으로 스크린을 누볐다는 이들은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배우는 모두 같다고 말한다. 깐깐한 태도로 완성된 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는 건 작업에 최선을 다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요, 화면에서 최대한 예뻐 보이고 싶은 건 모든 배우의 솔직한 심정. 그만큼 열정과 애정이 크다는 이야기다.
-오랫동안 조연이나 감초 역할을 맡아왔다. 주연급(?) 캐스팅을 제안한 <마파도>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느낌이 어땠나.
=김을동 | 그냥 나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왔구나, 싶었지 비중이 높다고 특별했던 건 아니다. 작업 자체는 재밌을 것 같았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수다도 떠는데, 좋은 사람들이랑 같이 놀라고 장을 펼쳐주고, 돈까지 준다니 그저 좋았다. 하지만 촬영지가 멀어서 고생스럽긴 했다.
=여운계 | 처음 물어본 게 촬영장소였다. 인천이라기에, 크게 부담이 안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전남 영광으로 바뀌니까, 큰일났다 싶었다. 왔다갔다하는 게 제일 고역이었다.
-캐릭터는 마음에 들었나.
=김수미 | 나는 마음에 들었다. 으스스하고, 무섭고, 카리스마도 있으면서, 눈빛연기가 많이 필요했다.
-오랜만의 주연작인데, 흥행에 대한 부담이 클 것 같다.
=김수미 | TV에서도 단독 주연은 몇 작품 못해서 시청률도 크게 신경을 안 썼는데 이번엔 확실히 다르다.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김을동 | 우리는 흥행하고는 무관한 존재다. 하지만 이런 압박감이나 긴장감도 나쁘지는 않다. 그래서 이런 인터뷰도 할 수 있었다. 언제 우리 셋이 이런 걸 할 기회가 오겠는가.
=여운계 | 관객은 많이 들면 들수록 좋은 거지만 결과가 어떨지는 짐작도 안 간다. 결말이라 자세히 얘기할 순 없지만 결국 이 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공짜로 얻어지는 건 없다는 것이 아닐까. 최선을 다했으니 나머지는 보는 분들에게 달렸다 하겠다.
-포스터가 자극적이다. 평소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라 망설였을 것 같다.
=김을동 | 우리 다섯명 중에 알레르기 반응이 제일 심했던 게 바로 나였다. 나는 정말 너무 심하게 흉측하지 않나. 남들이야 그냥 ‘김을동이 그렇지, 뭐’ 이러고 보겠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정말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가 강요하지 말라고, 잘라 얘기했더니 홍보팀이며 매니저며 황당해했다. 아니 영화에서 주인공이라고 영화를 찍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니….
=여운계 | 나는 내가 제일 망가진 것 같은데…. 영화에는 나오지도 않는 모습으로 포스터를 찍자고 해서 걱정이 됐다.
=김수미 | 처음 현장에서 가발이랑 옷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일 먼저 생각난 게 남편이랑 딸이다. 우리 딸이 포스터를 보고 ‘어쩜 이럴 수가 있냐’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개봉 전부터 포스터에 대한 반응이 들려오는 걸 보면, 배우가 그렇게 망가져주는 것도 때로 필요하구나, 싶다.
=여운계 | 난 김수미씨가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정말 감탄했다.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굉장히 무섭게 나왔는데, 그렇게까지 자기를 던질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
=김을동 | 사실 우리 김 여사가 제일 멋쟁인데. 오늘도 그렇고. 아직도 예쁨을 간직하고 긴장하고 사는게 아주 보기 좋다. 배우는 좀 그런 맛이 있어야 한다. 나야∼ 가공을 할 만해야 해보지, 뭐.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를 비교하니 결말 부분이 많이 삭제됐다. 아쉬움이 많았겠다.
=김을동 | 나는 정말 많이 잘렸다. 끝순이에 대한 여수댁의 애정표현이 다 사라져서 그냥 우악스런 여자가 돼버렸다. 대본대로 촬영을 했는데 그게 제대로 안 보여지면 배우 입장에선 속상하다.
-또 다른 아쉬움은.
=김수미 | <마파도>의 홍보 포인트는, 할매들만 사는 섬에 젊은 남자 둘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있지 않나. 나는 그래서 당연히 그들 중 누군가가 총각을 성희롱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근데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김을동 | 맞다. 음담패설도 지금보다 많아야 한다. 사실 이 영화에는 일상적인 할머니의 모습은 그런 대로 잘 표현됐지만, 탐욕스럽거나 엉뚱한 모습, 절박한 과부의 모습은 별로 없다. 이를테면 할머니 중 누군가가 자는 사내들을 넘본다든가, 그러다가 들켜서 당황한다든가 하는 게 있었으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여운계 | 할매들이 처음에 끝순이 얘기를 하는 장면도 문제다. 두 남자는 끝순이를 찾아 섬까지 온 거니까 그 이름만 나오면 뭔가 긴장하고 있다는 표정을 보여줘야 하는데, 지금은 두 사람의 반응 숏이 다 잘려 있어서 그 느낌이 별로 안 산다.
-다들 연기경력이 30년 이상씩 됐다. 특히 김을동 선생님은 여러 매체를 두루 경험한 걸로 안다.
=김을동 | 1967년 동아방송 성우로 데뷔했다. 그래서 연극을 수십편하고 성우를 했고, TV를 했고, 영화를 했고, 연기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외모가 이래선지 젊을 때부터 성격배우였던 것 같다. (웃음) 그래도 요즘은 우리 아들(송일국)이 멜로드라마도 하고 인기도 좋으니까, 괜찮다.
-세분 중에 제일 고참이 누구인가.
=김을동 | 여 선생님이 제일 위고, 김 여사가 나보다 약간 아래다. 근데 억울한 건 김 여사가 많이 아래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어른들이 많아서 현장 분위기가 매우 엄격했을 것 같다.
=여운계 | 그렇지도 않다. 난 남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타입이라 군기 잡는 데는 전혀 소질이 없다. (웃음)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라든가 맡고 싶은 배역 같은 건 없나.
=김을동 | 사실 배우는 언제나 선택받는 입장이다. 우리가 제일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 역할을 누군가가 맡기는 거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어떤 걸 기대하고 나를 캐스팅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김수미 | 그러니까 배우에게 맡고 싶은 배역이 뭐냐고 묻는 건, 잘못이다. 배우는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고 생각할 때 희열을 느낀다. 내가 일용 엄마를 처음 맡았을 때가 스물아홉이었다. 근데 60대 할머니를 만들어낸 거다. 그럴 때 느끼는 희열은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대박을 터뜨렸을 때와 맞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