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노래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은 물론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버금가는 고통은 공간적 제한으로부터 온다. 그들은 나다니기를 포기하고 제자리에 앉는다. 그들이 가는 대신 세상의 움직임이 그들에게로 온다. 그들의 촉수는 앉은자리에서 세상을 다시 쓴다. 장님들은 나무가 된다.
레이 찰스는 앉아서 로큰롤을 한다. 로큰롤이나 리듬 앤드 블루스는 무엇보다도 ‘발’의 음악이다. 그래서 앉은자세는 로큰롤과 불편한 관계이다. 음악이 생활 속에 자리잡을 때, 그것은 늘 몸의 움직임을 동반한다. 리듬은 언제나 본능적인 요구이다. 리듬은 몸짓으로 외화되고, 그때 음악은 들리기도 하지만 보인다. 음악을 보고, 음악을 접촉한다. 그런데 레이 찰스는 앉아서 그 음악을 한다. 앉아서, 사람들의 발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간다. 그의 음악에 붙는 가장 흔한 수식어, ‘영혼을 울린다’. 앉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는 영혼을 울릴 수밖에 없다. 그 방법밖에는 없다.
원초적 불신 치유하는 무방비 상태
스티비 원더가 이런 레이 찰스를 벤치마킹했고 엘튼 존, 빌리 조엘도 이 계열이다. 물론 이런 스타일은 더 오랜 계보가 있다. 패츠 왈러(Fats Waller). 1930년대. 뉴욕 스트라이드 스타일의 선구자, 하몬드 B 3 오르간의 명인, 천재. 익살로 승부하는 루이 암스트롱 같은 ‘엉클 톰’ 세대. 패츠 도미노(Fat Domino). 1940년대. 뉴올리언스 리듬 앤드 블루스, 부기 우기 피아노의 최고봉. 열광적.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1950년대 후반. 백인이고 별명은 ‘킬러’. 초기 로큰롤의 대표적 악몽. 피아노를 거의 린치하는 스타일. 냇 킹 콜. 주로 1940∼50년대. 달콤 보이스와 말랑말랑 피아노 터치….
10여년 전, 서울에 왔던 레이 찰스의 공연을 본 기억이 난다. 그의 거의 비틀거리는 듯한 움직임은 언뜻 그로테스크했다. 건반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몸짓은 아기의 몸동작처럼 원초적이었다. 표정 역시 기괴하게 느껴졌다. 웃는 얼굴인지 우는 얼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연이 진행될수록 그 얼굴은 황홀한 표정이었다. 그 기묘하게 황홀한 표정은 굉장한 개방성을 담고 있었고 결국 엄청난 해방감으로 이어졌다. 일종의 무방비 상태의 표현이었다. 무방비 상태. 그렇다. 무방비 상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이 이해한 레이 찰스에게서도 이 낱말은 키워드 중 하나 아닐까.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가 레이 찰스라는 인물을 복잡하게 만든다. 무대 위에 서면 그의 핸디캡은 그의 표현력이 된다. 조건없는 영혼의 개방을 통해 사람들은 비일상적인 해방감을 느낀다. 무대 위에서 그는 순수한 영혼의 상태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를 내려오면 문제는 달라진다. 시야의 차단은 과도한 자기 보호 본능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불신’을 낳는다. 절대로 남들을 믿지 않는 그는 1달러짜리 지폐로 개런티를 받기를 원한다. 얼마인지 따지기 전에 ‘몇장’인지 따진다. 불신은 유일한 방어수단이자 공격무기이다.
15살에 이 장님은 고아가 되었다. 돌보아줄 누구도 없는 상태의 그는 머물지 않는 사람이 된다. 허공에 몇번 몸을 던진다. 목숨을 건 여행들, 그 과정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앞 볼 줄 아는’ 사람들의 숱한 속임수. 모든 것을 열어 보이는 음악적 재능만이 그의 동반자였다. 그는 지독하고 철저해진다. 그리고 결국 자기를 넘어선다. 남들은 그냥 보지만 그는 꿰뚫어본다. 한마디로 그는 ‘자토이치’가 된다. 자토이치. 특히 연애할 때 그는 진짜 자토이치다. 팔만 만져도 여자가 미녀인지 아닌지 훤히 본다. 그의 미묘한 터치가 손을 거쳐 팔에 닿을 때, 이미 여자는 녹는다. 보통 사람의 귀에는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가 여린 새들의 노래가 레이 찰스를 도와준다. 그 소리들은 귀엽게 웅성거리는 로맨틱한 찬가들이 된다. 게다가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무방비 상태의 아기를 돌보고 싶어한다. 그중에서도 똘똘하고 섬세한 아기들을.
그는 죽어라고 연애한다. 연애는 움직임을 억누르고 있는 열정의 나무가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할 기회를 제공한다. 연애는 무대 위에서의 노래와 하나다. 노래를 들은 여자들, 함께 노래하는 여자들, 춤을 추는 여자들 모두 그의 노래가 된다.
그는 죽어라고 약을 먹는다. 특히 그가 빠져 있던 헤로인은 최고로 강력한 망각의 약이다. 몽롱의 상태는 앞을 가리고 있는 불신의 리얼리티를 제거한다. 약은 게다가 일종의 숫돌이다. 레이 찰스라는 자토이치는 약을 통해 자신의 음악가적 됨됨이를 갈고닦는다. 어차피 나는 바깥이야. 세상 바깥. 약은 계속되는 통과의례다. 이 세상 바깥으로의 불법적인 트립을 통해 그는 쉬지 않고 칼날을 벼린다. 그의 음악은 열리고 또 열린다. 약은 그의 음악의, 또한 성공의 도구다.
간결한 연출, 완벽한 사운드로 살아난 실재감
성공담. 테일러 핵포드의 <레이>는 성공담이다. 그는 일확천금이라든가 개천에서 용나는 과정 같은 것을 에누리 없이 숭배하는 미국 사람들의 정신을 대변한다. 그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출세’다. 미국 사람들에게 ‘출세’라는 개념은 마치 독일 교양소설의 ‘성장’과도 비슷한 개념으로 작용한다. 테일러 핵포드는 이미 <사관과 신사>(1982)에서 이 테마를 완성된 모습으로 보여준 바 있다.
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테일러 핵포드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코드는 ‘로큰롤’이다. 아주 초기부터 그에게 로큰롤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리서치의 대상이었다. 그의 장편영화 데뷔작인 <아이돌메이커>(1980)는 50년대 필라델피아의 로큰롤 스타 메이커였던 밥 마르쿠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 <리키 넬슨 트리뷰트>(1984)는 초기 로큰롤 가수이자 배우였던 리키 넬슨의 다큐멘터리이고 <라밤바>(1987)는 1950년대의 라틴계 로큰롤 아이돌이었던 리치 발렌스의 스토리, 또 <척 베리>(1987)는 로큰롤의 창시자 중 하나인 척 베리에게 바치는 다큐멘터리였다.
테일러 핵포드는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현란한 영상으로 관객을 뻑가게 하지도 않고 내러티브를 가지고 장난치지도 않는다. 그에게서 대륙적 담담함, 스트레이트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어떨 때는 좀 밋밋하다. <레이>도 그렇다. 이렇다 할 신선한 기법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약간은 뻔한 수법들로 장면들이 직조된다. 그러나 뮤지션인 인물의 음악을 신경 많이 써가면서 철저하게 고증하여 재현한 음악적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면 결코 나쁜 영화라 할 수 없다. 이 영화의 미덕은 도리어 그곳에 있다. 철저하게 현실의 그림에, 그리고 음악에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작용한 대목 말이다.
특히 귀에 와닿는 것은 아주 질 좋은 사운드이다. 사운드는 우선 공간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좁은 바, 호텔 룸, 커다란 홀, 레코딩 스튜디오 등 공간적인 분위기에 따라 사운드의 질감이 매번 달라진다. 영화의 고조감은 그 사운드의 변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성취된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허름한 바의 고즈넉한 사운드와 후반부의, 대중적인 성공을 이룬 대가수의 울림 풍부하고 기름진 콘서트홀 사운드의 차이는 레이 찰스가 겪은 인생의 굴곡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냥 약간의 차이가 아니다. 질감 자체의 완전한 차별이다. 이런 사운드의 재현력은 경이적이다.
레이 찰스 오리지널 넘버들의 복고적인 분위기를 현대적인 서라운드 음향을 통해 재현하여 관객의 귀를 시원하게 하되 원전의 맛 또한 잃지 않게 하려는 필사적인 노력 역시 사운드를 통해 전달된다. 대가의 음악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자체가 약간의 감동을 준다. 게다가 조금 전문적으로 봐도 흥미로운 디테일들이 간간이 배치되어 있다. 예를 들어 레이 찰스의 전매특허라 할 월리처(Wurlitzer) 전기 피아노가 레이 찰스의 방에 처음 배달되는 장면. 레이 찰스가 간단하게 몇개의 음정을 눌러보는데 그 사운드가 빈티지 월리처 전기 피아노의 온화한 톤을 제대로 재현한다. 디지털 시대의 팬들은 오히려 그런 따뜻한 아날로그 사운드에서 굉장한 노스탤지어를 느낀다.
모든 것은 남부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1930년에 태어나 2004년에 세상을 떠난 레이 찰스의 생애 중에서 대체로 1960년대 중반까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남부 촌동네에서 시작한 영화가 캘리포니아의 대저택에서 마무리된다.
이 영화를 보면 레이 찰스가 어떻게 가스펠과 블루스, 그리고 백인의 전유물이었던 컨트리까지 한데 녹여 자신만의 솔 음악을 완성해갔는지를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레이 찰스는 블루스에 가스펠을 혼합하여 자기 독창성을 획득한다. 까놓고 말하면 누구나 다 아는 가스펠의 멜로디에 블루스적인 속된 가사를 붙인 것인데, 이것이 결국 흑인 음악의 바탕이다. 그래서 그를 솔(soul)의 완성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음악적 완성의 길에서 레이 찰스가 보여주는 것은 거리낌 없음과 솔직함이다. 그는 욕도 많이 먹었다. 교회 열심히 나가는 흑인들에게는 가스펠을 악마의 음악에 팔아넘겼다고 욕먹는다. 나중에는 블루스에 컨트리를 섞어 흑인 음악을 망쳐버렸다고 욕먹는다. 돈에 눈이 멀었다는 욕도 먹는다. 물론 돈도 많이 챙겼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남부 촌놈이야. 어려서부터 컨트리도 듣고 자랐어. 컨트리에는 이야기가 있어. 나는 그게 좋아.”
미국의 흑인들에게 모든 것은 남부에서 시작된다. 그는 그런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다. 거리낌없는 노출상태, 자기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통해 모든 것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