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변화들>은 선택과 선택 뒤에 남는 후회,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선택지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 속의 인간은 후회하면서 동시에 갈망한다. 인간의 성적행동에 대한 보고서이지만 익히 봐왔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에릭 로메르의 세계에서 죄의식과 망설임을 빼면 <가능한 변화들>의 주인공 문호와 종규가 된다. 문호와 종규는 반복되는 행위의 패턴, 기억의 착시현상 등 홍상수의 미시적 심리학과도 조금 거리가 있다. 그들은 홍상수의 인물이라기엔 조금 더 거칠고, 조금 덜 귀엽다.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뻔한 치정극도 없고 누군가 죽는 파국도 없이 감독은 두 남자의 동물행동학을 적어내려간다. 때로 그것은 평범하지만 때로 그것은 야릇한 활력으로 우리를 자극한다. 동물행동학 보고서의 양식은 멜로인데, 멜로 가운데서도 바람 피우기이다.
문호(정찬)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로 한 뻔한 먹물형 루저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모습은 잡지 않는다. 문호가 하는 일은 술을 마시거나 아내 몰래 바람 피우는 일이다. 문호의 친구인 종규(김유석)도 먹물이다. 공부를 많이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학에 남지 않고 회사로 들어갔다. 직장을 빼먹으면서까지 연애에 몰두해 상사(유인촌)에게 혼이 난다. 종규 역시 공부나 직장업무보다는 연애가 주사업이다. 문호는 순진하게 채팅으로 바람을 피우고, 종규는 아무 때고 누구에게나 기회만 있으면 덤벼든다.
먹물형 수컷 고릴라의 성행동 연구는 제법 볼 만한 사례를 제공한다. 그들의 전략은 최대한 많은 기회를 잡는 것이며 전술은 거짓말이다. 모처럼 값싼 이탈리아 식당으로 가족끼리 외식을 하러 나간 날, 문호는 아내에게 작가와의 술자리가 있다고 말하고선 채팅에서 만난 윤정(윤지혜)과 번개를 한다. 문호는 윤정에게 결혼이 자유를 억압한다며 자신이 미혼이라고 말한다. 종규도 뻔한 거짓말을 해댄다. 그는 대학 후배이자 애인이었던 수현(신소미)에게 결혼했다고 거짓말을 해 수현의 부담감을 덜어낸다.
만약에 이게 영화의 전부라면 그건 짝짓기 행동 연구에 지나지 않겠지만, 문호와 종규는 후회하고 갈망함으로써 우리의 아픈 경험을 환기시킨다. 문호는 바람을 피우고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으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만난다. 토할 게 없을 때까지 변기를 부여잡고 토하는 그의 자세는 죄를 지으면서도 정화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모순을 드러낸다. 지칠 줄 모르고 세상의 모든 여인을 향해 치근덕대던 종규도 자신의 갈망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발걸음을 돌린다. 그가 사랑을 잃고 쓸쓸하게 돌아서는 장면은 아픈 기억을 건드리며 마음을 다치게 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뉘우치지 않는다. 문호와 종규가 라면집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여인을 여관으로 데려가 머리를 때려가며 하는 2 대 1 섹스장면은 꽤나 동물적이어서 남성들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현을 위해선 돈을 탈탈 털어 호텔 스위트룸까지 데려가지만 자신의 아이를 지운 회사 동료 미스 김(옥지영)은 여관으로 데려가는 종규의 마음씀씀이는 더 참담한 데가 있다. 남성은 여성을 속이고 이용해 섹스하는 동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건 남성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비틀어 보여주기 위함인가?
윤정과 수현 등이 보여주는 욕망은 그에 비하면 수줍고 내성적이다. 과장하자면 윤정은 지저분한 재래식 화장실이나 남들이 덮던 여관 침구에 겁을 먹는 결벽증 환자이며 수현은 에어컨 공기가 건조해 공기청정기를 놓은 까탈스러운 성격이고, 문호의 아내는 가족외식의 즐거움보다 비용이 더 걱정되는 주부다. 미스 김은 중절 수술을 한 날, 여관방에 함께 드러누운 종규가 다른 여자에게 음성메시지를 보내는 데도 태연하기만 하다. 남성의 욕망은 살아서 꿈틀대는데 여성의 욕망은 고작 남성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영화의 그림 절반은 그래서 불행히도 활기없이 바닥에 고여 있을 때가 있다.
카메라는 종규나 문호를 비출 때 예민하게도 욕망의 대상인 여성을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내며 남자들의 절망을 막막하게 잡아낸다. 그런데 그 울림은 바깥세상과 함께 공명하지 못하고 이따금 끊기고 만다. 그건 영화 속 남자들이, 자신이 갈망한 여자들의 마음까지 닿지 못했다는 좌절의 다른 표현일까. 끊임없이 여자들을 속이고 상처주고 그러면서도 그들을 갈구하는 건 우리 남자들의 뿌리 깊은 질병이라고 탄식하는 것일까. 종규의 불편한 왼쪽 다리는 그래서 남성들의 정신적 결함을 상징하는 장치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종규가 프리젠테이션 때 자리를 비우고 바람을 피우고 온 다음날 직장상사는 심하게 종규를 꾸짖는다. 종규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냐고 오히려 역정을 낸다. 후회없이, 반성도 없이 끝까지 내달려보는 종규의 면모는 꽤나 질감있게 우리의 마음을 향해 육박해 들어온다. 책상물림 캐릭터로는 흔하지 않은 동물형이며, 차마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곳까지 발을 성큼 내미는 대담함을 지니고 있다. 이 캐릭터야말로 영화의 뚜렷한 낙인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깊이 흔드는 건 종규의 내면의 힘이 아니라 종규의 불구이다. 그건 반성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우리 남성들의 내면의 불구를 상기시킨다.
민병국 감독 인터뷰
“한마디로 동경심에 대한 영화다”
민 감독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대기업 사원으로 5년 일했으며 영화 공부를 따로 한 적이 없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이후 6년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 나이가 겨우 두살 위인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 연출부로 일한 게 영화 경험의 전부.
=주인공들을 통해 반성을 하자고 하는 의미인가 아니면 주인공의 절망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한 건가.
-두 가지 다 맞는 거 같다. 장모님이 교회 권사이신데 사위가 만든 영화라니까 교회 분들을 모시고 본 모양이다. 그분들이 영화 끝나고 인사는 해야겠는데 망측스러운 장면이 있으니까 난감했던가보다. 어떤 분이 그랬다고 하시더라. 인생을 막 사니까 벌받는 거야.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지는 않았다. 운이 좋아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그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가 조금씩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종규, 참 독특한 캐릭터다. 어디서 힌트를 얻었나.
-주변에 그런 사람 많다. 영화 보면서 반응이 둘로 갈리는 듯하다. 대체로 괜찮게 사는 분들은 공감 안 하는 거 같고, 엉터리처럼 사는 분들은 많이 공감하더라. (웃음) 김유석은 <강원도의 힘> 촬영(김유석은 경찰 역) 때 알게 돼 가끔씩 연락했다.
=종규가 강한 인상을 주다보니 문호는 약해진 느낌이 있다.
-그런 것 때문에 더 어려운 역할인데. 배우들이 그래서 다 종규하려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문호가 사실상 영화를 끌어가는 역이지.
=수현과 윤정의 이미지가 참 비슷하다. 1인2역인 줄 알았다. 그런 이미지가 감독 자신의 판타지 아닌가.
-이승연을 캐스팅하고 촬영했다가 중도하차했고 몇달 있다 다시 찍은 영화인데, 이승연이 처음엔 1인2역 했다. 물론 뒤에는 1인2역이 아니다. 그런 스타일 안 좋아한다. (웃음)
=문호가 잠든 장면, 종규가 교회에서 나가는 장면은 주인공이 변화를 느끼는 계기인가.
-이 영화는 한마디로 동경심에 대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루기 원하는 것에 대해 바라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
=앞으로 계획은.
-디지털로 찍고 싶은 게 있는데 디지털리즘에 관한 것이다. 무겁고 극적이고 잔인한 영화도 하나 준비하고 있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어린이 가족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모두 내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