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미친채 살아남은 자의 슬픔, <스파이더>
2005-03-16
글 :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정신분열증에 대한 시적 접근,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역작 <스파이더>

탁월하고 심란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새 영화 <스파이더>는 마치 뤼미에르의 생명력과 가능성 넘쳤던 객관적인 다큐멘터리처럼 시작한다. 런던역으로 들어오는 기차. 카메라는 한 무리의 승객을 무심히 떠나보낸다. 유령 같은 데니스 클레그(랠프 파인즈)가 마지막으로 등장할 땐 이미 한 광인의 세상에서 유령들과 얽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가슴이 철렁거리나?

소설가 패트릭 맥그래스가 그의 1990년 역작을 각색한 <스파이더>는 이내 닫혀 있는 망상의 느낌을 일으키고 98분 동안 지탱시킨다. 정신분열증에 대해 임상적이기보다 시적으로 접근하며 실존주의적 공포로 가득한 이 심리적 고통의 환기는 그지없이 가혹하고 고상하게 표현되었다. 이 이야기는 맹렬하게 취해 뒤틀려 주인공의 초췌한 몸가짐에서 혹은 여인숙 방 벽의 지저분한 때에서 지극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천한 환각을 보여준다.

현실과 몽상을 체현하는 자기몰입적 연기

두려워하며 중얼거리며 치아와 손가락에 니코틴이 두껍게 묻어 있고 쇼크 요법이나 이전의 정신적 충격으로 머리끝이 곤두서 있는 정신병 환자는 이스트 엔드의 시설로 인도된다. 이 자립원은 산업용 운하를 사이에 두고 딱 맞지만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환경에 무자비한 신전처럼 서 있는 커다란 가스 탱크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자립원에는 잔인한 윌킨슨 부인(린 레드그레이브)이 군림하고 있다. 클레그의 텅 빈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기괴한 우연으로 이곳은 그가 화 잘 내는 배관공 아버지(가브리엘 번)와 그를 ‘스파이더’라고 부르던 어머니(미란다 리처드슨)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다.

아마 그마저도 그의 상상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내내 스파이더는 그의 과거를 헤집고 다닌다. 크로넨버그는 플래시백 장면들을 확신을 가지고 다룬다. 다 자란 스파이더는 그의 어린 시절 집을 출입하고 어머니를 몰래 지켜보며 아버지를 불러오기 위해 술집에 들어가는 고독한 어린 자신(브래들리 홀)을 따라가고 가족들이 우울하게 저녁을 먹는 동안 벽장에 숨는다.

맥그래스의 소설은 전혀 의지할 수 없는 해설자의 완벽하게 명쾌한 광적이고 아름답게 서술된 일인칭 시점의 일기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내레이션 없이 진행된다. 크로넨버그는 스파이더가 보는 것을 보여주고 또 스파이더도 함께 보여준다. 끊임없이 웅얼대는 데니스는 적어도 네개의 셔츠를 입고 길거리에서 다른 종류의 끈들을 모으며 아마 글이라는 걸 쓰지만 그의 너덜너덜한 비밀 노트북에 적힌 기억들은 단지 그만 이해할 수 있는 알파벳으로 갈겨 써져 있다.

영화에 충만한 이중성과 일치하게 연기는 화려하면서도 자기몰입적이다. 데니스는 놀랄 만한 집중력으로 자기 역에 빠져 있다. 그의 연기는 압도적으로 육체적이다. 거의 모든 대사를 숨을 껄떡이거나 침을 뱉어가며 읽고 그의 유창함은 은밀한 손재주로 대체되어 매번 위기를 만나면 싸구려 담배를 말아댄다. 또 다른 종류의 정신병자로서 리처드슨은 훌륭하게 연달아 여러 역할들을 맡아 스파이더의 우주의 법칙에 따라 계속 나타난다. 진실을 말할 때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 진실을 말하는 브래들리 홀의 어린 스파이더 또한 훌륭하다.

영화 또한 훌륭하다. 피터 서스치스키가 촬영을 한 명석하게 추상화한 세상의 침묵은 이야기가 그리스 비극처럼 섬뜩한 반면 육감적으로 따분하다. <스파이더>는 스파이더의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충격적인 이야기의 전환에서 영화는 어느새 환각상태로 빠져 들어간다- 주인공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창녀와의 성교를 자위로 상상하며 어머니의 요리가 원시적인 정액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며 처참하게 그의 어린 시절 분노가 윌킨스 부인의 자립원을 침범하게 한다.

크로넨버그의 유례없는 미학적 성공

크로넨버그는 분명히 거장이다. 자기가 거의 만들다시피한 색정적인 공포영화의 장르와 이별한 뒤 감독은 거의 매번 불가능한 각색을 통해 유례없는 일련의 미학적 성공을 거두었다. 두드러진 점은 <데드링거> <네이키드 런치> <M. 버터플라이> <크래쉬> <엑시스텐즈> 등의 영화들이 이성적이며 또한 직관적이라는 점이다. 소설에서 각색되었어도 <스파이더>가 그의 경력 중 가장 영화적인 작품일 것이다. 절제는 나무랄 데가 없다. 편집과 연기는 특별한 효과를 준다. 이야기는 여과되었지만 지나치게 크로넨버그화되어 있지 않다. <스파이더>는 허구 창조를 다루는 감독의 익숙한 주제적 고심들을 많이 피하고 있다. 자기 반영적인 <엑시스텐즈>보다 훨씬 더 정제되어 있다.

<스파이더>의 기술적인 위대함은 조심스럽게 건설한 주인공의 내면 인식의 안팎을 조정하는 특별한 능력에서 비롯된다. 이 스파이더의 거미줄이 지닌 속성은 무엇인가? 패턴은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그가 회상한 어린 시절 방, 기억 속에 나오는 요양원 원장 사무실의 깨진 거울, 놀이방의 직소퍼즐,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었던 고양이의 요람. 그녀가 이 거미줄의 중앙에 있나? 스파이더의 어머니 또한 이중 삼중으로 복제되어 영화 여기저기에 있다. 어느 시점에서 관객은 이야기가 계속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크로넨버그는 한 폐쇄된 세상을 풍부한 세부점들로 보여주다가 엄격하고 단순하게 보여주기도 하며 잘 꾸려나간다. 톤도 암울한 희극적 요소를 가지지만 누가 웃을 거라고 상상하긴 어렵다(아마 가장 비슷한 분위기로 음침한 유머와 악몽적인 미장센을 보여준 로만 폴란스키의 폐소공포증적인 1976년작, <테넌트>(The Tenant)가 생각난다). 이런 아찔한 완벽함에 누구나 만족하지는 못할 것이다. 크로넨버그의 인정된 모범인 사뮈엘 베케트도 그렇지는 못했으니까. <스파이더>는 마음에 오래 남도록 만들어진, 계속 보게 될 영화다.

(2003. 2. 26.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번역 이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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