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피터 팬>의 원작자가 작품을 쓰게 된 경위를 그렸다 한다. 흔히 이런 유의 영화에 대해 기대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작품과 그를 둘러싼 알려진 사실들을 종합하여, 당시 문화사적 볼거리와 교양을 늘리는 기회를 제공함. 둘째, 원작품의 행간에 녹아 있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탐구하여, 가령 ‘피터 팬 콤플렉스’라는 용어가 있듯이, 원작자의 ‘아이-되기’의 ‘심오한 철학’ 혹은 ‘심각한 정신병’의 근원에 관해 독특한 견해를 피력함. 셋째, 상상력의 흥미진진한 발로로 특히 원작자의 연애에 대한 아슬아슬한 뒷담화를 전개해 예술이냐 통속이냐 사이에서 미학적 윤리적 긴장을 한껏 고조시킴. 이를테면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첫 번째 재미를, <디 아워스>나 <카프카>는 두 번째 재미를 구가하였고,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세 번째 재미로는 백미였다.
이 영화는 어느 편일까? 첫 번째 재미는 <피터 팬>에 대해선 ‘모두 안다 치고’ 더이상 보여주는 것이 없는데다, 20세기 초라는 대단히 역동적인 시대에 대한 묘사도 나른한 공원 풍경만으로 때울 뿐, 어떠한 역사적 정황이나 인물도 더 등장시키지 않기 때문에, 이 영화를 봄으로써 얻게 되는 교양은 없다. 두 번째 재미는 ‘어려서 형이 죽었다’는 단순한 구술 외엔 아무런 묘사가 없으며, 그의 ‘아이-되기’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논쟁은커녕 독백장면 하나 없기에, 감독이 재해석한 ‘아이-되기’의 의미는 알 길이 없다.
세 번째 재미는 초반에 잠시 나오는 듯하다가 여주인공이 병듦으로서 무혐의 처리되며, 때마침 아내도 바람이 남으로써 공소 취하된다. 그들이 성애적 관계가 아니라 우정이었다는 것을 변명하는 듯한 기침발작과 죽음은 마치 욕망하는 여자가 자기 욕망을 부인하기 위해 증상을 만들어내는 ‘여성 히스테리아’ 기전을 보는 듯하며, 아내의 떠남 역시 외도하는 자의 의처증을 설명하는 ‘투사’ 기전을 연상케 한다. 결론적으로 시대물도 심리극도 멜로물도 아니고, 색다른 주장이나 유장한 이야기도 전혀 없이, 빈약한 상상력 속에 민망한 방어기전만 드러내는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실로 찾고자 하는 재미의 지점이 전무(Never!)한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들을 폭로한다. 바로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쇠퇴해가던 ‘위기의 극작가’가 어떻게 후속작을 흥행시킴으로써 재기에 성공하고, 마침내 ‘저명한 극작가’로 남게 되었는지, 오늘날에도 유용한 ‘업계의 비밀들’을 속속들이 알려주는 것이다.
영화 초반 그는 관객의 반응에 관심을 쏟고, 신문 비평을 스크랩한다. 극장 직원에게 “형편없다”는 말을 굳이 받아낼 만큼,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그에게 극장주가 말한다. “다 비평 때문이야. 연극은 그저 놀이(play)인데, 그들이 어렵게 만들었어.” 이제 그는 꿈꾼다. 평단을 따돌리고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작품성과 무관하게 흥행에 성공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 개봉 전에 작품 외적 관심을 높인다.
이를 위해 스캔들을 적극 활용한다. 배우나 극단에 관한 것도 좋겠지만, 그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자신의 스캔들을 이용한다. “작가 **가 요즘 애 넷 딸린 과부 집에서 살다시피 한다며?” “설마… 작품 때문이겠지, 요즘 아동 판타지물 구상 중이라잖아.” “그럼 그렇겠지, 제 가정은 어찌하고?” “그래서 마누라도 맞바람이 났다잖아….” “정말? 과부가 예쁜가보지?” “몰랐어? 그 과부가 바로 사교계 @@ 부인 딸이잖아.” 이런 소문이 파다해질 즈음, “사건의 내막이 궁금하십니까? 작가가 과부의 네 아들을 만나 썼다는 <피터 팬>을 보시면, 그들의 만남이 작품구상을 위한 것이었는지 불륜이었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직접 보시고 판단해주세요” 정도의 멘트라면 사전홍보로 반은 먹고 들어간다. 배우의 자질구레한 스캔들이나 촬영장 에피소드 혹은 공연물윤리위원회의 등급판정이나, 심지어 <그때 그 사람들>류의 법정공방도 사전 홍보의 일환으로 관리된다.
둘째, 개봉에 맞춰 이벤트를 한다.
자선의 의미도 있고,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할 관객에게 보인다는 의미도 있는 무료시사회이다. 작가는 개봉 첫날 25석을 분산하여 남기고, 고아원 아이들을 초청, 무료 관람시킨다. 그들은 ‘극장 구경’ 자체에 이미 들떠 있으며, 작은 볼거리에도 “까르륵… 꺅”을 연발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자발적인 박수부대, 혹은 바람잡이인 셈이다. “고상한 관객이 요정과 해적이 나오는 이 극을 어찌 보려나” 염려하는 극장주의 근심은 일소된다. 그들은 옆자리에 앉은 고아들을 불쾌하게 느끼는 자신의 비도덕과 싸우는 한편, 아이들이 순수하게 열광하는 극을 보고 유치하다고 느끼는 자신의 스노비즘을 검열해야 한다. 그들은 도덕적/미학적 분열 속에서 표정관리를 하느라, 자신의 감상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다. 요즘도 배우의 팬클럽이나 홈페이지 응모자를 대상으로 한 무료시사는 작품성보다 후한 입소문을 내줄 것을 기대하기에 널리 행해지는 홍보방법이며, 특정인들을 대상으로 한 시사, 가령 <공공의 적2>의 검찰청 시사, <집으로…>의 청각장애인 자막시사는 그들이 재미있게 보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홍보거리로 활용된다.
셋째, 극에 이분법적 가치판단을 포함시켜,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 편’에 서도록 유도한다.
공연의 말미에 섬뜩한 대사가 나온다.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마다 요정이 하나씩 죽어요. 믿는다고 말하면 살아나지요. 요정을 믿나요? 믿으면 박수를 치세요.” 극작가에 대해 가장 부정적이었던 과부의 어머니마저 울면서 손뼉친다. 누가 아니겠는가? 요정뿐 아니라 동심, 가족애, 생명 등 가치를 무차별화 시키는 온갖 것들에 대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양단논법을 들이댄다. 산타를 믿나요? 모(부)성애를 믿지요? 아이를 살리고 싶죠? <폴라 익스프레스> <포가튼> <가족> <맨 온 파이어> 속에는 이런 기묘한 인질극이 탑재되어 있다. 단칼에 부인하기 어려운 전통적인 가치들뿐 아니라, 때로는 페미니즘 역시 저열한 인질극에 동원된다. <팻걸> <여자, 정혜> <엄마…> 등은 ‘여성’을 방패처럼 착용하여, 마치 이 영화들을 반대하면 ‘여성주의’에 반대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 아무리 후져도 ‘No’ 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일명 ‘벌거벗은 임금님 전법’을 구사한다.
넷째, ‘실화’임을 강조한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말한다. “이 아이가 바로 피터로군요.” 모델의 존재로 증명되는 ‘실화’는 곧바로 진정성이 있다고 오인된다.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등 비난의 소지가 많은 이야기일수록 ‘실화’임이 강조된다. 주제에 관한 논의를 흐림으로써 화살을 피하는 것이다. 거기에 역사성과 죽음이 곁들여 있다면 그 무게 때문에 누구도 뭐라 말하기 힘들어진다. <실미도>는 이에 충실히 따랐다. 결과는 “어쨌든, 석세-스!”
어쩌자고 이 영화는 ‘업계의 비밀들’을 낱낱이 고하는 걸까? 예전에 TV <호기심 천국>에는 외국 마술사가 마술비법을 공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국내 마술사들의 항의가 잇따랐지만 수입화면은 매주 방영되었다. 그 화면들은 선진국에서 낡은 마술기법들을 폐기 처분함으로써, 새로운 마술기법의 경쟁우위를 굳히고자 만든 것이라 한다. 할리우드가 이제 100년간의 마케팅 전략들을 폐기하기로 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위험천만한 천기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