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할리우드의 귀여운 여인 테레사 라이트가 천국의 첫 계단을 딛고 올라섰다. 영화 <미니버 부인>(1942)으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던 그는 지난 3월6일 미국 코네티컷의 예일-뉴헤이븐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86살.
<미니버 부인>이라면 다들 여우‘주’연상을 받은 왕년의 스타 그리어 가슨을 떠올릴 테지만, 테레사 라이트는 순결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로 1940년대와 50년대의 할리우드에서 정상급 여배우로 활동하며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테레사 라이트는 배우로 데뷔한 뒤 첫 3편의 영화로 연이어 오스카 후보에 오른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데뷔작인 <작은 아씨들>(1942)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에 올랐고, 이듬해 출연한 <미니버 부인>과 <야구왕 루 게릭>으로 동시에 여우조연상과 주연상 후보에 올라 <미니버 부인>으로 당당히 오스카를 거머쥐었다. 이 기록은 이후 한번도 깨진 적이 없다.
테레사 라이트는 이후 앨프리드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1943), 말론 브랜도의 데뷔작인 <그 남자>(1950), 아카데미를 휩쓸었던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에 출연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타임>은 어린 나이에 정상의 연기를 펼치는 그를 두고 “할리우드의 가장 훌륭한 젊은 연기자 중 하나”로 평가했는데, 이처럼 높아져가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테레사 라이트는 금발의 글래머들이 유독 득세하던 1940∼50년대의 성적 스테레오타입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그는 수영복 차림의 핀업사진 촬영을 거절했으며, 싸구려 연예잡지들과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50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외모를 가꾸는 것보다는 연기에 더 자신이 있으며, 나보다 외모가 뛰어난 배우들은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다”며 당당한 소신을 밝혔다.
말년의 테레사 라이트는 프랜시스 포드 코플라의 <레인메이커>(1997)에 출연했고, 브로드웨이 무대에 간간이 서면서 지나간 영광의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다. 금발 시대에 단단히 영글었던 갈색머리의 여배우는 수영복 사진 한장 없이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