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여, 너는 정녕 죽으리라” 또는,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을” 같은 시구는 우리를 죽음과 대면시킨다. 이 시를 쓴 사람은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이고, 그의 시세계를 ‘위트’로 요약한 사람은 병상에 쓰러져 있는 비비안(윤석화)이다. 먼지 묻은 서가에만 파묻혀 일생을 보낸 여교수는 난소암 4기 판정을 받고 난 다음에야 자기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누구의 죽음이든 그것은 우리를 위축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정직하게 삶의 문제를 응시하게 만든다. 그 점에서 연극 <위트>(마거릿 에드슨 작, 김운기 연출)는 보기 드문 죽음의 연극이고 형이상학의 연극이다. 90분간 우리의 예고된 죽음(누구에게나 꼭 전달되는 편지의 내용이 바로 이것 아닌가)을 대신 죽어주는 윤석화를 향해 우리는 신체이탈에 맞먹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 연극은 미리 한번 죽어보는 값지고 진지한 기회가 된다.
50살까지 친구이며 애인은 물론 결혼 한번 한 적 없이 살아온, 깐깐하기 짝이 없고 성적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존 던 전공 교수 비비안은 난소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8개월간 항암 치료를 받으며 머리는 삭발을 해야 했고, 병상 위에서는 다리를 벌리고 각종 수치스런 검사를 받으면서 비비안은 죽음이 존 던의 시만큼 품위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병원은 그녀의 죽음을 막는 것보다 그녀의 죽어가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의학지식에 더 관심이 많을 뿐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녀의 삶을 난폭하게 발가벗기면서 오히려 그녀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한다. 그리고 이 각성의 과정을 거치며 비비안은 ‘죽음조차 나를 죽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가 죽는 순간, 비비안은 무척이나 가벼워 날아갈 듯 보인다. 비비안의 피와 살은 모두 말라붙어 파리하기 짝이 없지만 무대는 그럼으로써 오히려 꽉 차게 된다.
그러나 평소 자신의 죽음은 물론 남의 죽음에도 관심이 없다면 존 던의 기지 넘치고 통찰력으로 가득한 시들은 지루한 교과서 낭독처럼 들릴 것이며, 당최 의사처럼 보이지 않는 신인배우들이 새된 소리로 지껄이는 대사들은 유독 거슬릴 것이고, 신인연출가가 의욕적으로 준비한 효과음은 잡음처럼 들릴 것이며, 콘트라베이스 주자 나장균과 윤석화의 앙상블 말고는 볼 게 그다지 없다고 투덜거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