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완전하고 영구한 러브스토리, <지금, 만나러 갑니다>
2005-03-22
글 : 김혜리
<환생>의 봉투에 접어넣은 <러브레터>. 장맛비와 함께 찾아온 죽은 아내와 또다시 사랑에 빠지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세계는 모든 것이 지독하게 푸르다. 너무 푸르러서 이곳에서는 아무도 아무것도 죽지 않을 것 같다. 우아한 깃털 구름이 흩뿌려진 하늘 아래 거울 같은 호수가 있고, 그 가장자리를 돌아 자전거를 달리면 젊은 아빠 타쿠미(나카무라 시도)와 어린 아들 유지(다케이 아카시)가 사는 숲가 작은 집에 도착한다. 봄바람이 습기를 품자 타쿠미는 일기예보에 심장이 덜컹이고 유지는 테루테루 보우즈(갠 날씨를 기원하는 인형)를 거꾸로 매단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기우제를 드린다. 1년 전 병으로 숨진 타쿠미의 아내 미오(다케우치 유코)의 약속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다시 비의 계절이 돌아오면 둘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러 올 거야.” 그리고, 미오는 정말 돌아온다. 문간에 버려진 갓난아기처럼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미오에게 남편과 아들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긴다. 고교 시절 짝꿍에서 부부가 되기까지 더딘 사랑의 사연을 타쿠미가 미오에게 조금씩 들려주는 동안 두 사람은 열일곱의 그날처럼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해의 우기(雨期)는 유난히도 짧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겨울연가>와 함께 2004년 일본 열도를 홍조로 물들인 대표적 ‘준아이’(순애)물이다. 세 순애보는 모두 출판, TV, 영화, 음반 등 다양한 장르의 상품으로 번식해 큰 수익을 올렸다. 이들이 그리는 순애란 어떤 사랑인가. 순결한 사랑(純愛)이며 사랑을 위해 몸 바치고 희생하는 극진한 사랑(殉愛)이다. 그러기 위해서 배신이나 권태의 얼룩은 용납할 수 없다. 또 유일하고 영원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주인공들은 모두 중·고등학교 시절에 평생의 사랑을 만나는 굉장한 연애운을 누린다. “몇번을 만나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라는 타쿠미의 대사는 유일한 사랑의 이상을 요약하고 있다.

순애의 까다로운 조건을 성취하는 손쉬운 방법은 사랑을 동결 건조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사랑의 당사자 중 한쪽이 젊고 아름다운 시체를 남기고 죽어야 한다. 단, 죽은 자는 살아남은 연인에게 계속 말을 걸어와야 한다. 이 대목에서 ‘사자(死者)가 보낸 편지’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 소설들이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로 가지를 친다. 한국영화 <편지>에서는 제목 그대로 죽은 남편의 편지가 도착하고 <겨울연가>는 죽은 첫사랑이 ‘똑 닮은’ 남자의 몸을 빌려 찾아온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서 죽은 첫사랑은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어른이 된 남자친구에게 연신 속삭인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미오는 아예 되살아난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시 떠날 날을 대비해 아들의 십수년치 생일 케이크를 예약해놓는다. 또, 순애보에서 사랑은 자연의 질서만큼 확고부동하고 위대한 섭리다. 그래서 순애보 영화와 드라마에서 날씨와 계절과 풍경은 결정적이다. 눈과 비, 안개와 태풍, 호수와 바다는 항상 사랑하는 남녀와 함께 웃고 흐느낀다.

만약 눈물로 몰입할 수 없다면, 순애보의 패턴들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조심스럽게 배치되어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즐기는 방법일 터다. 스토리상으로 미오는 처음부터 죽은 사람이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장마와 함께 왔다가 갈 그녀는 시한부 인생의 여주인공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타쿠미는 긴장과 속도를 견디지 못하는 신경 장애가 있다. 그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타쿠미가 미오에게 다가가는 속도를 지체시킨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스러져가는 미오와 자꾸 쓰러지는 타쿠미의 사랑을 영원의 성채로 만드는 장치는 조숙한 아들 유지의 존재다.

미오는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자의 사랑으로 영생을 누리는 곳을 ‘아카이브 별’이라고 이름짓지만, 영화의 비주얼은 다름아닌 타쿠미 가족의 공간을 별나라로 그린다. 미오가 다시 돌아오고 떠나는 호젓한 숲은 치히로가 행방불명된 터널처럼 신비롭다. 퇴근길 남편의 자전거에는 영자신문에 싸인 꽃다발이 흔들리고, 소녀 같은 아내는 아무리 궂은 날에도 하얀 치마를 팔랑인다. 두 사람이 결혼을 결심한 장소 또한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도 울고 갈 만한 찬란한 해바라기밭이다. TV 연출자 출신의 도이 노부히로 감독은, 드라마 여주인공의 액세서리처럼 유행이 될 만한 사랑의 ‘숙어’를 만들어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타쿠미의 주머니를 빌려 손을 녹이는 미오의 버릇, 남편의 턱 아래 머리를 파묻고 잠을 청하는 ‘베스트 포지션’은 반복을 통해 관객의 마음에 새겨진다.

소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원작자는 폐소공포증 발작이란 장소의 넓고 좁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로 그 자리부터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부자유한 상황에 일어나는 증세라고 설명한다. 그와 비슷하게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반전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의 과정을 자신의 의지로 주도하기를 꿈꾸는 많은 여성들의 판타지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러브스토리에서 미오는 희생자가 아니라 통제자다. 남편과 아들은 그녀가 없으면 어쩔 줄을 모른다. 타쿠미의 장애는 생활의 짐이 아니라 남편이 언제까지나 그녀의 곁에서만 편안히 숨쉴 거라는 약속이다. 신체적 장애 때문에 세상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인물이 나오는 또 다른 일본의 러브스토리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와 달리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세상은 타쿠미를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 직장 상사인 사법서사 소장조차 늘 낮잠만 자고 있을 뿐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그려내는 판타지는 그래서 본의 아니게 현실적 로맨스의 이면을 비춘다. 미오와 타쿠미의 완전하고 영구한 러브스토리는, 현실의 연인인 우리가 무엇을 어그러진 사랑의 핑계로 삼는지 거꾸로 보여준다. 그때 헤어졌더라면! 그때 알았더라면!

원작소설의 작가 이치카와 다쿠지

폐소공포증 작가의 5m 세상

<지금 만나러 갑니다>(양윤옥 옮김/ 랜덤하우스 중앙 펴냄)는 2004년 일본 출판시장이 낳은 7권의 밀리언셀러 중 한권이다. 출판사는 이 책의 전단을, 역대 최고 판매고를 올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사이에 끼워 “다음번은 이 책 차례입니다”라는 식의 마케팅을 벌였다.

작가 이치카와 다쿠지는 “평균치의 사람에서 다양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로 만들어진” 남자라고 묘사되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주인공 타쿠미와 많이 닮았다. 이치카와 역시 학창 시절 육상선수로 뛰다가 무리한 훈련으로 발작한 경력이 있다. 100m를 11초대, 20km를 1시간20분에 주파했던 시절, 위험신호를 무시하고 폭주하다가 신경의 밸브가 망가진 것이다. 불면증과 폐소공포증, 음식을 씹을 수 없는 평생의 장애가 시작됐고 집 밖 500m를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주된 증세의 하나는 호흡을 극명히 의식한다는 것. 작가의 홈페이지에는 죽음에 대한 명징한 의식을 상세히 서술한 문장들이 있다. 이치카와 다쿠지는 ‘무엇인가 해버릴 것 같은 공포, 혀를 깨물 것 같은 공포’를 말하면서 자신은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의 상극으로서, 반드시 살고 싶지만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곧 반려자를 바라보며 아직도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소설의 갈망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추상화보다는 드라마틱한 종교화를, 무조음악보다는 귀에 쏙 들어오는 음악을 즐기는 이치카와 다쿠지가 이상으로 삼는 소설은 이안 매큐언이나 존 파울즈의 작품 같은 소설이다. 2002년 <Separation>으로 데뷔해 <연애사진, 또 하나의 이야기> <그때는 그에게 인사를 부탁해>를 출간한 작가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반경 5m 내의 세계에만 흥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캐릭터를 발명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영감의 세계가 한정되어 있기에 우선 10권은 써볼 생각이지만, 그 이상은 반복이 되지 않겠냐고 스스로 내다보고 있다.

출처: 작가 홈페이지(http://doorinto.txt-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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