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스크린속의 연인이 내겐 너무 많았던 건지, 아니면 거의 없었던 건지…. 어렸을 때 극장에서 살다시피 한 적이 많았다. 친구들이 많을 땐 연극을 하고 놀았고, 한두 명 정도면 극장엘 갔다. 혼자서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영화의 한 장면을 흉내 내어 보거나 하였다. 혼자서 길거리를 걷다가도 앞에 가던 아저씨가 바바리 코트에 선글라스를 꼈으면 영락없이 한 장면이 됐다. 나는 혼자서 “파랑새 나와라 파랑새, 여기는 지리산, 지금 내 앞에 수상한 사람이 가고 있다. 간첩인 것 같다. 예의 주시하겠다. 오버” 이렇게 중얼거리며 앞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담벼락에 착 붙기도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 갔다. 혼자 거울을 보며 엄앵란이 신성일에게 뺨을 맞고 울면서 S자로 뛰어가는 모습을 흉내내기도 하고 전옥 할머니의 지엄하고 무시무시한 대비마마의 역할을 흉내 내어 보기도 하고 <연산군>,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를 재구성하여 허구헌날 연극을 하며 놀기도 했다.
영화는 정말이지 내 인생의 친구이자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대개 주연급이 아닌 조연급, 혹은 강렬한 인상을 주는 성격 배우인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남자 배우로는 김승호, 이예춘, 허장강 등이 강렬하게 남아있고, 여자배우로는 엄앵란, 최지희 등 60년대의 말괄량이 혹은 반항적 청춘 스타이거나 악역을 너무나도 멋있게 해내는 전옥, 혹은 윤인자 등이 그들이다.
내게 연인이 있었나 없었나 그게 현실인지 지금이 현실인지
외국배우로는 단연 찰리 채플린이다. <박서방>, <마부>, <로맨스 빠빠>, <쌀>, <월급봉투>, <육체의 길> 등 모두 김승호씨의 연기가 인상 깊게 남아있는 작품들이다. 이예춘씨의 역할은 대부분 악역이였는데 그의 잔인하고 무서운 연기와 표정은 현실세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런데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였는지, 그가 뱃사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 그토록 선하고 한 많고 정 많은 역할로 변신했을 때 또 한번 그의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랐다. 허장강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게 느물느물하면서 뻔뻔스럽고 잔인한 역할들을 많이 했는데 이경희씨와 함께 한 <이 세상 어딘가에>에서 벙어리 부부로 나왔을 때, 그 가난한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재봉틀마저도 빼앗겼을 때 나는 너무 슬프고 비통해서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흐느껴 울었다. 세상에 그렇게 선한 연기를 잘하다니, 역시 허장강은 최고였다.
청춘스타 엄앵란의 <맨발의 청춘>, <맨발로 뛰어라>, <말띠 여대생>에서의 톡톡 튀는 연기는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엄앵란씨가 어느 날 <배신>이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배신을 때렸다. 웃통을 벗고 있는 신성일과 함께 커다랗게 찍힌 포스터의 제목은 <배신>이었는데 그 영화를 찍으면서 둘이 결혼하기로 했단다. 결혼 이후 시어머니의 구박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너무 걱정이 되서 이태원에 있는 엄앵란의 집으로 찾아 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가 극장이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처음 <모던 타임스>에서 찰리 채플린을 만나고 나도 저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래서 그에 관한 기사, 영화, 책은 그 이후로 빠지지 않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너무나 많은 배우가 내 삶의 이곳저곳에 각인되어 있다. <25시>, <희랍인 조르바>의 안소니 퀸, <스파르타쿠스>의 커크 더글라스, 제랄드 빠르디유, 로버트 드 니로, 대니얼 데이 루이스, 더스틴 호프만 , 버트 랭커스터…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현실세계를 확장시키고, 현실에선 만날 수 없는 캐릭터들에 주로 나는 매료되었던 것 같다. 내 삶의 반 정도는 영화 속 스타들과의 만남이었고, 그것이 현실인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현실인지 정말 헷갈릴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