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축축한 런던 거리를 유령처럼 쏘다니는 이 남자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구부정한 자세로 불편한 걸음을 뻗으며, 시종 알 수 없는 말을 혼자서 중얼거리고, 수시로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를 노트에 휘갈기는 그는 보는 이의 마음속에 그늘을 만드는 존재다. 깨어진 거울 속 이미지처럼 조각난 기억 또는 자아의 파편을 짜맞추는 사내의 이야기 <스파이더>는 과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작품답다. 하지만 <스파이더>가 이룬 성취를 전적으로 감독 몫으로 돌린다면 그건 부당한 일이다. 스스로를 완전히 ‘거미-인간’으로 변화시킨 레이프 파인즈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그저 ‘스파이더 맨’이 됐을지도 모른다(그는 자신의 이름이 영어 고어의 발음을 따라 ‘레이프’라고 발음한다고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사실, 태생부터 <스파이더>는 레이프 파인즈를 빼놓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프로듀서 캐서린 베일리와 함께 이 시나리오를 접한 것은 1998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원작소설의 작가인 패트릭 맥그래스에 의해 각색된 이 시나리오는 수년간 여러 가지 이유로 필름이라는 육체를 얻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스파이더> 시나리오가 크로넨버그의 책상에 놓이게 된 것 또한 파인즈 덕분이었다. “그 시나리오를 오로지 레이프 때문에 읽었고 그와 함께 작업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고 크로넨버그는 회상한다. 영화가 촬영되는 동안 파인즈는 스파이더 자체였다. 스파이더의 주머니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잡동사니들은 모두 파인즈가 촬영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주운 것이었고, 노트를 빼곡하게 채운 상형문자도 모두 그가 직접 쓴 것이었다. 숱한 정신분열증 환자와 의사, 간호사를 만난 것 또한 그 자신이 스파이더가 되기 위해서였다. “크로넨버그는 정신분열증 환자를 정확하게 묘사했는지 여부에 발목잡히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그런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머리가 아닌 몸이 캐릭터 자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연기 철학은 외모에서도 드러났다. “나는 24시간 내내 캐릭터 속에 들어가 생활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옷이 주는 느낌, 육체성에는 매우 영향을 받았다”며 그는 직접 네겹의 셔츠와 깡똥한 바지를 손수 골랐다. “베케트가 노트와 가방을 들고 파리를 어슬렁거리는 그 유명한 모습을 떠올렸다”는 크로넨버그와 파인즈의 생각은 영화 초반의 장면에서 재현됐으며, 베케트의 짧은 뒷머리는 파인즈에게 그대로 복사됐다.
파인즈는 스파이더만큼은 아니지만 유난히 짙은 그늘을 갖고 있다. “그는 아름다운 집이다. 그러나 거기엔 굳게 잠겨 있는 몇개의 방이 있다”는 한 동료의 말처럼. 그런 탓인지, <쉰들러 리스트>의 악마 같은 독일 장교, <퀴즈 쇼>의 사기꾼 교수,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헝가리 귀족 등 그에게 찬사를 선물한 캐릭터는 얼굴의 절반 이상을 어둠 속에 담그고 있는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건 그가 영국의 국립극단,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등 명문 극단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정통파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를 피터 오툴, 리처드 해리스, 앨버트 피니, 리처드 버튼 같은 영국 남성스타의 계보를 잇는 선굵은 배우라고 칭하는 것도 그 탓이리라.
마음의 고향인 연극 무대에서 입센과 셰익스피어의 세계를 펼치느라 2002년 이후 필모그래피를 텅 비워놓았던 파인즈는 올해 6개의 작품을 쏟아낸다. 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제임스 아이보리의 <하얀 백작부인>을 비롯해 <충실한 정원사> <해리 포터와 불의 잔> <크로모포비아> <첨스크러버> <월레스 앤 그로밋>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의 옷을 갈아입는 파인즈의 패션쇼가 펼쳐질 것이다. 6벌의 캐릭터 모두가 그에게 딱 맞지야 않겠지만, “배우의 피부는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환상을 창조하기 위한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그의 말에 걸맞은 작품도 있을 터. 이 고전미 물씬한 영국 배우의 팬들에게 2005년은 경탄과 감동의 한해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