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잠복근무>에서 신인배우 하정우가 맡은 인물인 조 형사는 경찰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캐릭터다. 조 형사는 의욕 넘치는 신참 여형사 천재인(김선아)이 매번 작전 수행을 방해한다고 여겨서 그녀를 무시한다. 후배 형사가 넘어야 할 산이자 야심의 이면을 알 수 없는 냉정한 인간형. 안경알 너머에는 낌새 나쁜 눈빛이 숨어 있다.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은 인상이 좀 닮았지만, 하정우의 눈매는 조 형사의 것보다 훨씬 동그랗다. 영화와 만화, 책을 좋아한다는 그는, “야쿠르트 아줌마들처럼 동네마다 비디오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어 어릴 때부터 안데르센 동화의 애니메이션부터 각종 영화를 두루 섭렵”해왔고 “좋아하는 영화는 백번이고 다시 보는 성격이라 특히 <대부>를 바이블 삼아 호연지기를 키웠다”고 말하는 스물일곱 청년이다. 묻는 질문에만 대답할 것 같은 묵직한 이미지가 재치있는 어휘 사용으로 가볍게 출렁인다.
“힘들더라도 그것이 견딜 만하면 소주 마시면서 그 고통을 즐기지만 진짜 견디기 힘든 고통일 땐 조깅과 줄넘기를 해요”라며 “힘든 일을 이기는 데 벅찬 호흡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아요”라는 그는 7년간 수영을 했고 수영선수의 꿈을 갖고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해 수영부 코치가 한 선배를 쇠파이프로 때리는 광경을 보면서 포기했지만. 공부가 삶의 전부는 아니므로 중·고등학교 때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며 지냈고, 중앙대 연극학과에 진학했다. “연극학과에 가는 건, 배우가 완성되기 위한 과정의 의무교육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넘겨도 될 대목에 그가 의미를 부여할 때면 꼭 신선한 비유가 덧붙는다. 오랫동안 글을 끼적여온 사람처럼. “어릴 때부터 일기를 매일 썼어요. 지금은 홈페이지에다 비공개로 쓰고 있는데 언젠가 책으로 낼 생각도 있어요. 캐릭터 공부하는 셈 치고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나만의 느낌도 정리해놓고 있어요. 나중에 연기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요.”
군대 있을 때 국방홍보영화를 찍은 걸 제외하면 그가 찍은 첫 영화는 <마들렌>. “정신도 없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촬영한 첫 작품 이후 <슈퍼스타 감사용>을 찍었고, 단막극 중심으로 활동한 TV에서는 드라마 <무인시대>에 출연했다. “그 드라마 못 보셨어요? 그게 지방 시청률이 좀 좋아서…. 문경에 가면 알아봐요. 이덕화 선생님 셋째아들, 하면.” 하정우는 <잠복근무>에 이르러서야 ‘배우로서의 관리’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됐다며, 첫 주연작이자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소개될 독립장편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 대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기도 했다. “다른 영화들은 제 기여도나 연기의 설득력이 50%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연극작업하듯 한신, 한컷을 감독과 얘기하면서 준비했거든요. 지금 제 나이와 제 역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걸 다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하정우는 배우로서 자신에게 맞는 옷이 “일그러진 캐릭터”인 것 같다고 했다. “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캐릭터가 양식적이기도 하지만” 그는 조니 뎁의 영화들과 조니 뎁의 캐릭터에 매료돼 있고, <프랑켄슈타인> <코미디의 왕> <케이프 피어> 속의 로버트 드 니로를 좋아한다. 드라마를 촬영할 당시 “현실적인 샐러리맨 같은” 선배 연기자들에게서 원치 않은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는 생각 많은 신인. 그는 로버트 그린의 책 <유혹의 기술> 속 한 구절을 읊었다. “‘완벽한 상상으로 현실을 잊어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현재에 바로 통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통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 타협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철없는 소리로도 들릴 수 있겠지만, 꿈만 크게 갖자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얼마 전부터 발레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해 줄넘기를 넘듯. 헉, 헉, 헉. 배우로서만이 아닌 영화인으로서 미래의 자화상을 크게 품은 그에게서 벅찬 호흡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