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준이 출연하는 영화 <외출>의 촬영현장이 공개된 지난 17일, 촬영 장소인 삼척으로 가면서 내 생각은 이랬다. 내외신 기자가 300명 넘게 온다고 했다. 그러면 영화에 대한 깊은 취재는 불가능하다. 그래. 이건 영화 취재가 아니다. 한류 취재다. 배용준 취재하러 온 100명이 넘는 일본 기자들을 취재하는 거다.
그렇게 정리하는데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혹시 배용준에게 독도 문제를 묻고, 그 답변을 크게 쓰는 매체가 있지 않을까? 에이, 천박하게 그러진 않겠지. 아냐. 배용준은 대표적인 한류 스타인데 혹시라도 그가 일본쪽에 비분강개하는 발언을 하면 기사는 되잖아. 그럼 영화 촬영현장 와가지고 독도 발언 가지고 기사를 써? 이쯤에서 짜증이 났다. 왜 우리 언론은 어떤 문제가 터지면 다른 모든 걸 거기다 끌어다 붙여야 하나. 한동안 그렇게 떠들다가 다른 문제 터지면 그쪽으로 다 몰려가고. 세상엔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이 꾸준하게 진행돼가고 있는데….
그 다음엔 자조다. 어차피 누워서 침뱉기다. 나도 그 풍토 속에서 십몇년 기자생활 해왔잖아. 다른 매체가 다 배용준 독도 발언을 기사로 보내는데 나 혼자 개기면서 우겨 봐? “배용준하고 독도하고 무슨 상관이야? 비분강개하든 쿨하든 그건 사람 나름인 거지 배용준이라고 특별할 게 있어?” 아냐. 그건 독자가 판단할 일이야. 또 배용준 정도의 스타라면 그런 질문을 마주할 줄 알아야 하는지도 몰라. 그냥 점잖게, 과장하거나 토달지 말고 배용준 답변만 기사 끝머리에 살짝 붙이는 거다. 내가 묻지는 말고 남이 질문한다면. 나는 품위를 지켜야지. 이 기회주의자!
마침내 기자회견장에서 배용준에게 독도문제를 묻는 질문이 나왔고 배용준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 우려와 관심이 많지만 이 자리에서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답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까? 그 답이 그렇게 궁금한가? 내속에서 반문이 들렸다. “누가 궁금하대? 언론이 보도하니까 그냥 보는 거지.”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로 환원되면 답은 요원해진다.
그런데 며칠전 한 유선방송에서 파파라치가 찍은 영상을 모은 프로그램을 봤다. 크리스천 슬레이터가 나이트클럽에서 나와 차에 타려는 걸 찍으면서 파파라치가 뜬금없이 이렇게 묻는다. “이라크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막 춤추다 나온 이 배우의 답. “지금 그걸 말할 계제냐.” 거기엔 무리인 줄 알면서도 묻고 받아치는 유머가 있었다. 비약인지 몰라도 그게 유머가 되는 바탕엔 이런 게 있지 않을까. 너 나름의 생각이 당연히 있을 거고, 그걸 표현하건 피하건, 또 표현할 시점과 장소를 언제로 하건 네 자유임을 인정해주는 존중과 여유 같은 것. 배용준에게 독도를 물을 수도 있고, 또 배용준은 피할 수도 있다. 그날 기자회견장을 돌이켜보면 그런 존중과 여유가 조금씩 커가는 것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