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무엇을? ‘여기’를!
<사이드웨이>의 두 남자 마일즈와 잭도 망각하고 싶은 게 퍽 많은 아저씨들이다. 이류 탤런트쯤 되는 잭은 일주일 뒤 결혼을 앞두고 있다. 약혼녀는 예쁜데다 성격도 좋아 보이고 유복한 부모까지 패키지로 갖추었다. 영화에서 으레 보아온 젊은 새 신랑이라면 행복에 겨워 몸부림칠 상황이다. 하지만 나이 마흔 넘어서까지 자유를 만끽하며 온갖 짓 다하고 살았을 (게 틀림없는) 잭은 뒤늦게 들어서려는 반듯한 제도권의 세계가, 한 치수 작은 셔츠를 입은 것처럼 왠지 어색하게 느껴질 터이다. 처가에서는 한 마리 온유한 수사슴 같던 그는 여행길에 나서 친구 마일즈의 차에 올라타는 순간, 스컹크과(科)가 되어 마주치는 모든 여자들에게 ‘질질’ 추파를 던진다. 샛길을 찾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밀려드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싶은 건지 모른다.
마일즈의 형편은 더욱 복잡 미묘하다. 잭이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밤을 뜨겁게 불태워보자’라고 말할 때 마일즈는 ‘이 나이 먹도록 해놓은 게 하나도 없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사실 둘 다 같은 얘기다, 쩝.) 사랑하던 아내와 몇 년 전에 이혼했지만 아직 허망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그는 소설쓰기를 통해 샛길을 꿈꾼다. 그러나 출판사에서는 연락이 없고, 옛 아내의 재혼소식만 들려온다. 그 와중에 자신의 소설을 정성껏 읽어주는 여자를 만나 설레기도 하지만 평생에 도움이 안 되는 친구 놈 때문에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만다. 일상을 잊기 위해 떠나온 여행이지만 길 위의 순간들은 또 다른 ‘여기’가 되어 그들을 지질하게 옭아맨다.
귀환은 여행서사의 불문율이다. 자동차 보닛은 찌그러지고, 코뼈가 주저앉아 콧등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였을망정 그들은 결국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필설로 다 못할 우여곡절 끝에 되찾아온 결혼반지가 잭의 손가락에서 관습처럼 번쩍인다. 마일즈는 소설 출판이 어렵겠다는 통지를 받는다. 그는 조용히 중학교 영어 선생의 자리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읽힌다. 샛길, 옆길, 골목길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인생의 다른 가능성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그런 것일까.
마일즈가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구석에 홀로 앉아 햄버거와 함께 들이키는 것은, 결혼 10돌 기념일에 따고 싶어 장식장 한 구석에 곱게 모셔두었던 1961년산 와인 ‘슈발 블랑’이다. 완벽한 일탈은 불가능하고 명백한 샛길은 존재하지 않지만 때론 와인 한 잔이 사람을 위로하고 조금쯤 고무하기도 한다. 지리멸렬하고 어수선한 짧은 여행을 통해 인생을 통째로 뒤바꿀 새로운 길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그 사소한 여정을 거쳐 그들은 약간, 아주 약간, 변했다. 존재의 전환이란 본디, 그렇게 하잘 것 없이 시작되는 법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