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복숭아 주스 한 병을 사 마신 적이 있다. 뚜껑을 열어 한 모금을 채 마시기도 전에 갑자기, 정말 느닷없이, 완전히 잊고 있었던 지난날의 어떤 기억들이 화들짝 떠올랐다. 모든 감각이 이십 수년 전의 한때로 순간 이동했다. 눈물나게 그립고 빛나던 한때. 도대체 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때의 기억이 그토록 생생하게 떠올랐을까?
고등학교 초년 시절의 여름에서 가을 무렵, 부산 서면의 뒷골목에 있던 ‘모모’라는 음악다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바로 근처에 있던 ‘물방울’과 더불어 ‘모모’는 좀 ‘노는’ 애들의 사교장이자 해방구였다. ‘노는’ 친구 하나를 따라 우연히 가본 그곳에서 나는 ‘미향이’를 만났고, 그 애를 보기 위해 매일같이 그 집을 찾았다. 미향이는 늘 우산 꽂은 크리스털잔에 가득 채워진 복숭아 주스를 마셨고 나도 그랬다. 이따금 ‘정애’도 만났고, 두어번 ‘희진이’와 마주 앉기도 했지만, 그 애들도 그 복숭아 주스를 마셨고 나도 그랬다.
그 얼굴을 볼 수 있는것만으로 살아 있음이 허무하지 않았다
바로 그 복숭아 주스의 냄새였다. 세상엔 복숭아 주스도 많지만 딱 그때 그 복숭아 주스의 냄새를 기억하게 만든 복숭아 주스는 그 편의점에서 마신 그 복숭아 주스가 처음이었다. (나는 확신한다. 냄새는 기억의 가장 강력한 촉매제다. 겪어보면 실감하게 된다.)
일단 복숭아 주스의 추억이 부활하는 순간, 그때 그 주변의 온갖 기억들이, 마른 짚단에 불길이 번지듯 화악, 순식간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기억나지 않았던 많은 이름들, 얼굴들, 노래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웃을 때마다 살짝 찌그러지던 미향이의 작은 보조개, 정애와 함께 걸으며 받쳐 들었던 우산의 색깔, 두 갈래로 땋은 희진이의 머리칼 냄새…. 그 냄새의 기억 한쪽 언저리에 부산 대한극장이 있다.
‘모모’에서 딱 서른두 번쯤 엎어지면 코가 닿는 거리. 거기서 <해바라기>를 보았다. 이탈리아 배우들은 왜 그렇게 멋있는 걸까?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는 닮고 싶었고 소피아 로렌은 갖고 싶었다. 정말이지 소피아 로렌은 말도 못하게 근사했다. 그 여자는 아무리 슬플 때도 청승맞아 보이지 않고, 아무리 기쁨에 들떠 있어도 경박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물끄러미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극단의 슬픔을 표현할 줄 알았고,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리는 것만으로 지상의 행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엘 시드>라는 영화를 본 뒤로 나는 이미 소피아 로렌의 광팬이었다. 그러나 <엘 시드>에서의 소피아 로렌은 2% 부족하다. 그 풋풋하고 ‘뽀사시’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어딘가 단순하고 약해 보이며 조금은 꾸며진 느낌을 준다. <해바라기>에서의 소피아 로렌은 <엘 시드>에서보다 훨씬 더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풍부한 표정을 갖고 있었다. 더없이 행복할 땐 표정 한구석에 슬쩍 불안의 그림자를 깔아둘 줄 알았고, 절망에 빠져 망연해진 얼굴엔 보일 듯 말 듯 설렘이 엿보인다. 천진하고 수줍은 표정 한켠엔 도도한 위엄이 깃들어 있고, 단호하고 굳은 얼굴 한쪽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나약함이 숨어 있다. 세상의 어떤 못난이라도 다 받아 줄 것 같은 너그러움이 보이는가 하면, 세상의 어떤 잘난 남자도 가까이 못할 서릿발이 비친다.
영화 속 소피아 로렌은 예뻤다. 그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살아 있음이 허무해지지 않을 만큼. 그 얼굴을 다시는 기억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죽는 게 두려울 정도로. 그러나 그 예뻤던 소피아 로렌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미향이의 예쁜 보조개도, 정애가 씌워주었던 노란 우산도, 희진이의 윤기 흐르던 두 갈래 머리도, 점점 아스라해져 간다. ‘모모’가, 그때 그 뒷골목이 그립다. 그러나 이젠 복숭아 주스 안 마실란다. 몸에 좋은 인삼 주스나 마실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