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영화를 다시 만나기까지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니고,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만들어진 영화를 홍보해서 극장에 걸고 싶은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흘러 버려지고, 잊혀지고, 사라진 영화에 온 정성을 쏟는 이들은, 한국영상자료원 사람들. “한편의 영화는 저작권자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보호하고 전수해야 할 문화환경”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 소중한 환경을 보존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영상자료원의 일상은 언뜻 두터운 시간의 지층 아래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옛것들을 찾아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만신창이로 발견된 옛날 자료들을 일일이 손보고, 정성스럽게 복원한 영화들을 꾸준히 상영하느라 언제나 분주한 영상자료원을 둘러싼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이 일화들은 멀게는 20여년 전, 가깝게는 최근까지 다양한 시기에 걸쳐 일어났던 일들이다. 민감한 부분이 있을 수 있어 정확한 시기는 밝히지 않았으며, 최대한 실명공개를 자제했다. 당신이 영상자료원에 대해 궁금했던 몇 가지 것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영상자료원의 어두운 과거와 달라진 현재
영화사 관련 논문을 준비 중이던 영화평론가 A씨. 그는 일찍이 영상자료원의 도움 없이 해방 이전 한국영화에 대한 책을 저술했을 만큼 씩씩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영화평론가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갖게 된 그는, 염치 불구하고서라도 보고픈 영화를 두눈으로 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는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은밀한 도움을 요청한 상대는 바로 영상자료원의 부장급 간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청탁을 받은 간부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무실 구석의 은밀한 선반에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건네주는 게 아닌가. 테이프 안에는 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영화의 프린트를 스크린에서 영사하면서 임시로 찍었던 조야한 영상이 들어 있었다. 허걱. 이렇게 엄청난 특혜를 받게 되다니. 감동의 물결 아래로 왠지 모를 죄책감이 밀려든다. 그런데 빠끔히 선반 안을 엿본 결과, 이는 기우로 밝혀진다. 그 안에는 이미 수십여개의 테이프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는 심심찮게 이런 요구를 해오는 이들을 위한 영상자료원의 은밀한 서비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정당하게 자료원에서 뭔가를 보고 싶어서 가장 안달났던 인물이 바로 이효인 원장님 아닐까요? 아마 그분, 그때의 한을 풀기 위해 자료원장으로 부임하셨을 걸요?”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자료원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조영정씨의 농담 섞인 짐작이다. 그럴 만도 하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정된 정보는 특정인들에게만 접근이 허용했고, 철옹성 같은 지식권력으로 무장한 채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곳은 그야말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지금이야 특정 자료가 자료원에 존재하는지부터, 열람 가능 여부까지 단번에 홈페이지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됐다지만,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 “1950년대 영화 중 어떤 것들을 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지를 문의하는 전화는 숱한 담당자들 사이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이니 대부분의 한국 영화사 연구자들이, 자료원에게 자료 공개를 요구할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효인 원장은 이에 대해, “새로운 자료가 들어와도 일반인들이 보여달라고 덤빌까봐 공개를 꺼리는 현실이었다. 어떤 자료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주고, 요청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기에 당시 자료원의 예산과 인력은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전신은 재단법인 한국필름보관소. 전시기능이 제외된 필름 창고에 불과했던 이곳은, 북한이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의 정회원이 된 데 자극받아 1974년 자본금 100만원으로 부랴부랴 출범한 기구였다.
“내 필름 당장 내놔!”
고질적 문제, 저작권
나른한 오후의 사무실. 험상궂은 인상의 혈기방장한 노인네가 씩씩거리며 들이닥친다. “내 필름 내놔!” 앞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울려퍼지는 고성의 주인은, <잠자리에 들 시간>을 비롯한 몇개의 연출작을 찾아 자료원을 급습한 방규식 감독. 이런 때일수록 의연한 대처가 필요하다.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시죠. 뭔가 오해가 있을 겁니다. 방 감독의 영화는, 출처는 물론 정확한 저작권자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수집한 자료의 일부로 밝혀졌다. 문제는 방 감독에게는 그 영화들에 대한 저작권이 없었다는 사실. 수집팀의 B씨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자 성미 급한 감독은 “내가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걸 충무로가 다 아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멱살잡이에 나선다. 그래도 소용없다. 법적인 증빙이 되지 않는다면 세상이 다 아는 사실도 무용지물. 퇴근 뒤 B씨는 그와 함께 소주 한잔을 기울인다. 저작권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에 대한, 뻔하지만 절실한 충고를 곁들이면서. 그로부터 몇년 뒤, B씨는 다시 방 감독의 전화를 받게 된다. 말기 암으로 주변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소장 필름과 기타 자료의 소유권을 딸에게 이전하려던 방 감독은, 언젠가 자신에게 따뜻한 충고를 건네던 B씨를 떠올린 것이다.
극장 개봉을 목표로 만들어진 영화의 경우 영화사가 해당 영화의 새 프린트 한벌씩을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영화필름 등의 제출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 1996년. 이전에 제작된 영화 중 영상자료원이 보유한 자료는 두 가지 형태로 관리된다. 저작권자가 원할 경우 언제든지 출고가 가능한 상태로 관리를 대행하는 ‘위탁’과 물권은 완전히 이전한 상태에서 무상 대여 혜택을 주는 ‘기증’이 그것이다. 문제는 주먹구구식으로 맡겨만 주십사 하며 영화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모을 수밖에 없었던 초창기 자료원의 수집방법이, 복잡한 저작권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는 결과를 초래한 것. 일단 자료원 보유 필름을 외부에서 상영하거나 DVD로 제작·판매하기 위해서는 저작권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저작권자를 알 수 없는 경우 혹은 저작권자가 그러한 요구를 막무가내로 들어줄 수 없다고 버티면 아무리 귀중한 자료라도 창고에서 썩이는 수밖에 없다. 그 밖에도 영화사의 이름을 빌려서 영화를 제작한 뒤 아무런 소유권 주장을 할 수 없게 됐거나, “내 필름을 내가 다시 가져가겠다는데 웬 참견이냐”면서 고집을 피우는 원로영화인들의 온갖 불만과 요구에 일일이 응대하는 것은 자료원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케이블 방송국들이 우후죽순 개국하거나, DVD 붐이 일거나, 요즘처럼 모바일 콘텐츠 확보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때아닌 자료원이 열병에 시달리는 것도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다. 한때는 영화의 방송권을 넘기면 제법 재미가 쏠쏠하다는 소문을 들은 모 영화인이, 무작정 들이닥쳐 필름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자료원 보관필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자, 그는 “영상자료원이 필름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다기에 한번 와봤다”는 대답을 남기고 조용히 사라졌다고. 멋모르는 원로영화인들에게 헐값에 방영권이나 콘텐츠 활용권을 사들인 뒤,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되파는 브로커들의 집중 활동 시기 역시 바로 그 무렵이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저기요…. 자료들도 잘 있죠?”
수집가들과의 줄다리기
수집팀의 C씨는 여느 때처럼 전화기를 들었다. 각종 포스터며 프린트를 소장하고 있는, 그러나 자료를 넘겨줄 것은 한사코 거부해왔던 모 수집가에게 안부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소중한 자료들이 이불장 안, 침대 밑, 습기 많은 창고 어느 구석에서 훼손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지만 일단은 별수가 없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자료들도 잘 있죠?” 실없는 인사를 건네는 수밖에. 조만간 이사를 갈 예정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니, 이사라고? 귀가 솔깃해진다. “아, 그러세요? 그럼 그 많은 자료들 가지고 이사하시려면 힘들지 않겠어요? 그냥 저희가 대신 보관해드릴게요.”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그러나 지나친 관심표명은 최대한 자제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꺼내는 C씨의 심정이 조마조마하다. “그래? 그럼 그럴까? 당장 내일 올 수 있나?” 여부가 있나요, 당장 찾아뵙겠노라 약속을 잡는 C씨. 귀에 걸린 그의 입꼬리가 좀처럼 내려올 줄을 모른다.
수집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돈이 아주 많아서 영화뿐 아니라 도자기며 우표 등 몇종의 수집품목을 자랑하는 경우 그리고 한 가지에 집착해서 수집을 벌이다가 그로 인해 가산을 탕진한 경우. 그러나 어떤 쪽이든 광기에 가까운 수집증을 자랑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기만족을 위해 자료를 모아온 대부분의 수집가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안 판다”며 버티게 마련인데, 처음부터 그 고집을 꺾으려고 나서면 될 일도 그르친다는 것이 장광헌 팀장의 말이다. 일단은 오랜 시간을 두고 친분을 쌓은 뒤에 일을 진행시키다보면 어느 순간 자료를 넘기겠다는 뜻을 먼저 밝혀오기도 한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손때 묻은 자료를 넘겨주는 대가로 그들이 요구하는 높은 가격. 자료의 가치와 그 때문에 수집가가 희생한 것들을 고려하면 그리 무리한 요구는 아니지만, 자료원의 빠듯한 예산을 생각하면 난감한 노릇이다. 현재 자료원은 자료의 희소성과 중요도, 예산을 고려해서 합리적인 가격을 책정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편 수집가들의 기이한 습성뿐 아니라 자신의 영화를 신주단지 모시듯 내주지 않으려는 원로영화인들도 골칫거리. 자신이 만든 영화를 어떤 이유에서건 다른 곳에 넘겨준다는 것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77년작 <난중일기>처럼 제작사와 감독, 주연배우 사이에 저작권 정리가 안 돼 있던 탓에 문제가 커지는 경우도 있다. 복원작업을 위해 <난중일기>의 네거필름을 영화진흥위원회에 맡긴 틈에 주연배우가 이를 들고 제주도까지 도주한 일화는 아직도 생생하다. 이불장 안 이불 사이사이에 필름 캔을 숨겨놓았던 문제의 노배우은, 결국 딸의 설득으로 이를 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