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도쿄] 우익이 사랑할 ‘반전영화’들이 온다
2005-03-29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야쿠쇼 고지 주연의 <로렐라이> 필두로 릴레이 개봉하는 일본 전쟁영화들
<로렐라이>

‘전쟁영화의 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일본엔 올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액션대작이 쏟아진다. 여성관객 대상의 순애보영화 일색에 대한 반발심리와 최근 몇년간 일본영화가 인기를 되찾아가며 이전과 같은 대작도 해볼 만하다는 투자심리 등이 작용한 탓이 크다. 그 스타트를 끊은 것이, 지난 3월5일 개봉한 <로렐라이>. 개봉 12일 만에 흥행액수 10억엔, 관객 80만명을 돌파하며 쾌조순항 중이다. 감독을 맡은 히구치 신지는 <가메라> 시리즈 등으로 알려진 일본 최고의 특수촬영감독. 일본영화에선 최초의 본격 잠수함 영화이며,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도호의 액션 대작들의 뒤를 잇는다는 점과 야쿠쇼 고지, 쓰마부키 사토시, 야나기바 도시로 등 호화 출연진 등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전쟁영화를 만드는 작가, 후쿠이 하루토시

하지만 무엇보다 이 인기의 중심은 작가인 후쿠이 하루토시다. 오는 6월 개봉할 <전국자위대 1519>, 여름 개봉의 <망국의 이지스>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전국자위대 1519>는 자위대의 특수실험부대가 수백년 전의 전국시대로 빨려들어가 오다 노부나가와 얽힌다는 오락적 성격이 강한 작품. 에구치 요오스케, 스즈키 교카 등이 출연하고 <고질라> 시리즈로 유명한 데쓰카 마사아키가 메가폰을 잡는다. 한국의 채민서 출연으로 말많았던 <망국의 이지스>는 생화학무기를 탈취해 해상자위대 이지스함을 점거하고 도쿄를 향해 전 미사일을 조준한 테러리스트와 이를 막으려는 해상자위대원의 이야기. 사카모토 준지가 감독을 맡았고 사나다 히로유키, 데라오 아키라, 나카이 기이치 등이 출연한다. 올해 후쿠이 원작의 영화 세편엔 일본의 실력있는 남자배우들이 총출동하는 형세다.

1968년생인 후쿠이는 경비회사에 근무하던 중 출판사에 투고한 소설 <강의 깊이는>으로 주목받은 뒤 98년 <트웰브 Y.O>로 추리문학의 권위있는 에도가와 람포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99년 <망국의 이지스>로 각종 상을 석권했다. 방위와 자위대, 전쟁 등 일본의 첨예한 정치적 사안을 작품 배경으로 끌어들이며 요즘 인기작가로선 보기 드물게 선굵은 액션 추리물들을 연달아 성공시키고 있다. <로렐라이>의 경우 감독 히구치의 제안으로 함께 공동창작을 해나가며 후쿠이는 소설을, 히구치는 영화를 완성시켜나간 독특한 예지만, 이 역시 이른바 전형적인 ‘후쿠이 월드’를 보여준다.

1945년 8월7일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더이상의 원폭공격을 막으라는 비밀임무를 받고 패전 독일로부터 극비리에 입수한 신무기 ‘로렐라이’를 실은 잠수함이 출동한다. ‘로렐라이’는 해저의 지형을 그대로 눈앞에 보여줄 수 있는 비밀의 무기, 미군들에 ‘마녀’라 불리는 이 무기를 가동시키는 건 사실은 파울라라는 어린 소녀다. 미군은 나가사키에 이어 도쿄에마저 핵폭탄을 떨어뜨리려 하고, 야쿠쇼 고지를 비롯한 잠수함 대원들은 아무도 명령하지 않은 마지막 작전에 나선다.

반전하지 못하는 반전영화

<로렐라이>에는 히구치다운 애니메이션적 상상력(비밀병기를 작동시키는 소녀!)과 할리우드 대작의 감상주의(마지막 작전은 <아마겟돈>을 떠올린다)가 뒤섞여 있다. 보는 이에 따라 눈에 거슬리는 컴퓨터그래픽 장면도 애니메이션적인 분위기에선 묘하게 어울린다. 하지만 여느 할리우드 작품들보다 이 영화가 호소력이 있는 건 바로 일본인들에게 진지하게 ‘지켜야 할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나름대로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후쿠이의 인기는 외국인, 특히 한국인에겐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독도나 역사교과서 문제가 연달아 터져나온 요즈음 더더욱 그렇다. <로렐라이>의 첫 장면은 히로시마의 원폭장면이다. “다 타버린 폐허 속에서도 일본은 절망에서 일어날 것이다”라는 식의 대사도 나온다. <망국의 이지스>에서 참사를 일으키는 이의 목적은, 전쟁의 비참함을 잊은 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일본인들과 비상의 상황에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국가를 조롱하는 것이다.

무책임한 정치가나 윗세대들을 비판하며 소년 소녀들에게 ‘살아남아라’를 이야기하는 <로렐라이>는 분명 반전영화다. 하지만 전쟁에 이른 자신들을 반성하되, 자신들이 타자들에게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인식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문제는 이런 소재들이 거리낌없이 등장하는 분위기를 극우들이 이용한다는 데 있다. 평화헌법 개헌론자들의 가장 큰 논리는 쉽게 말하면 ‘자신도 지키는 전쟁을 할 권리도 없는 국가가 무슨 국가냐’라는 것이다. 2005년 쏟아지는 전쟁영화와 그에 대한 인기는, 현재의 일본이 서 있는 위태스런 지점의 한 징후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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