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은 아시안 스타, <엘렉트라>의 윌 윤 리
2005-03-31
글 : 오정연
사진 : 정진환
<007 어나더 데이> <엘렉트라>의 윌 윤 리

한국 매니지먼트사와 활동 계약을 맺기 위해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고국을 찾은 재미동포 배우와 30분간 짤막한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갑작스런 미션이 떨어졌다. 윌 윤 리. 이 낯설고도 익숙한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 기억을 더듬는다. 한국에서 개봉한 그의 출연작은 <007 어나더 데이>와 <엘렉트라>(비디오 출시작으로는 <토크>가 있다). 웬만한 무술 실력을 바탕으로 할리우드 액션영화 속 비중있는 악역을 맡았던 동양 배우, 정도로 생각은 정리됐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강남의 한 호텔 비즈니스 룸에서, 자폐아들을 대상으로 한 짧은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올 그를 기다렸다. 한국말은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가장 궁금한 것은 그 정도였다.

근육질을 내세운 다소 느끼한 첫인상을 예상했는데, 그는 생각보다 왜소한 몸에 예상외로 깊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2002년 <피플>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 중 한명으로 선정된 이야기를 꺼내본다. “내 사진이 우연히 그 리스트에 끼어들어갔던 모양이다. (웃음) 아니면 그저 목록을 채워줄 아시아인이 필요했거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농담 속에 일말의 진심을 담는 장난기어린 그 모습에 잠시 망설였지만, 준비했던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 아시아계 남자 배우들을 악역으로 기용하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캐스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마도 수십번은 더 받았음직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질문일 게다. 당연한 말이지만, 편견은 할리우드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역할로 등장한 영화는 딱 두편이다. 그외에는 모두 <페이스> <왓츠 쿠킹> 등의 선댄스 초청작이나 캐릭터가 강조되는 TV시리즈였다. 규모가 큰 할리우드영화는, 나의 일부분밖에 반영할 수 없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배우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태권도 사범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고, 의사나 변호사가 되길 원하는 부모의 뜻을 따라 UC버클리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던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배우의 꿈을 좇아 LA로 떠나왔다. 그 계기를 묻자 “‘나이브’(naive)가 무슨 뜻인지 아냐”며 반문한 그가, “처음 연기를 시작할 무렵의 내가 딱 그 상태였다. 이게 이렇게 힘든 길인지 몰랐다”는 대답으로 그간의 어려움을 슬쩍 내비친다. 일년에 대여섯번 정도, 아시아계 배우가 응모할 수 있는 좋은 역할의 오디션에 매번 노심초사했던 그지만, 현재 할리우드에서는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블록버스터영화가 기획 중이다. 올 가을쯤 촬영에 들어갈 영화의 시나리오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친근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트루 로맨스>식의 액션영화가 될 것이라고. 그의 다음 목표는, 박찬욱, 강제규 등 존경하는 한국 감독들과의 작업이다.

18년 만에 다시 찾은 고국 땅에서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한 젊은 배우는, “오전 5시. 커피를 마시면서 촬영을 기다리는 동안 멀리서 동이 터오는 걸 보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 행복감이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 때문이 아니라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조심스런 덧붙임과 함께. 정해진 시간은 모두 끝났는데 그에게 궁금한 것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인터뷰 중간 더듬거리는 한국말을 던지곤 했던 그가, 다음번엔 서로 한결 능숙해진 한국말과 영어를 선보이자며 인사를 건넨다. 머지않은 미래에 또 다른 인터뷰가 성사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제법 아쉬웠을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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