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타이틀]
강신우의 모래 속의 진주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2005-04-01
글 : 강신우
영화 속에서 앞을 못 보는 캐롤(카메론 디아즈)은 자살한 한 여자의 인생을 설명하며 이와 같이 말한다. “하긴 누가 여자의 인생을 그렇게 진지하게 보겠어.” 영화 속 대사와는 반대로, 여자의 삶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루어진 로드리고 가르시아의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여자들의 외로운 일상을 감성적으로 묘사해낸 인상적인 데뷔작이다.

1999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직접 쓴 시나리오를 통해 제작 지원을 받아 완성한 이 영화는 글렌 클로즈, 카메론 디아즈, 홀리 헌터, 발레리아 골리노 등의 화려한 여성 배역진으로 더욱 유명하기도 하다. 이 영화를 완성해낸 또 하나의 일등공신이 눈빛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말하는 멋진 여배우들이라는 사실은 감독 자신도 의심치 않을 것이다.

DVD로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서라운드 음향에 시원한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제격이라는 사람들에겐 실례의 말이지만, 나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세밀하게 짜여진 드라마야말로 DVD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필름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가장 좋은 시청 환경이겠지만, 그것이 힘든 지금의 상황에서는 1.85:1 화면비의 영상을 단 1인치도 헛되이 쓰지 않는 이 영화의 독특한 영상미를 온전히 감상하기에는 DVD야말로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촬영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슬리피 할로우> <알리>의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와 함께 여자들의 외로움을 치밀하게 계산된 화면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화면의 대부분은 절반 이상이 텅 비어있거나 벽이나 온갖 사물로 그 시야가 막혀있다. 심지어는 화면의 윗부분을 필터를 씌운 듯 어둡게 처리하는 극악의 처방까지 써가며 인물들의 막막하기만 한 심리를 시각적인 기교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화면의 양쪽이 무참하게 잘려나가고 독특한 색감이 사라져버린 비디오 화면을 통해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DVD 또한 제대로 된 화면비와 오리지널 음성 수록이라는 장점을 제외하고는 단점으로 가득하지만, 이 영화가 가져다주는 진한 감동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사양이다.

그런데 문학청년이라면 로드리고 가르시아라는 이름이 친숙하게 들릴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멕시코의 대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이다. 최근 그는 죽음을 통해 삶을 만들어내는 장의사들의 이야기 <식스 핏 언더>와 마법과 현실이 뒤섞인 어두운 세계 <카니발>과 같은 기이한 TV 시리즈들을 훌륭하게 연출해내었다. 이를 보면 그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영화의 모든 내용을 함축하는 시적이고 감성적인 이 영화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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