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하의 C&C]
[백은하의 애버뉴C] 20th street / 어느 날 갑자기 삶과 죽음의 중간에 선다면
2005-04-06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테리 시아보, <바다 속으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리고 나

어느 날 갑자기 유언도 마지막 인사도 나눌 겨를 없이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게다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그 중간상태에 놓여 십여 년 간을 식물처럼 살아가야 한다면.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 기약 없는 시간들을 견뎌내야 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잔인한 테스트일 것이다. 굳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가정해 보는 것조차 끔찍한.

지난 3월 31일 테리 시아보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15년 전 뇌사상태에 빠져 식물 인간이 되어야 했던 그녀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테리의 경우는 단순히 한 여자가 삶을 선택하느냐, 죽음을 선택하느냐 하는 개인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사이보 케이스’라고 불리 울 만큼, 그녀의 생명은 돈과 이해관계를 둘러싼 부모와 남편 사이의 지리한 법적 논쟁으로 진흙탕 속을 허우적댔다. 만약 테리가 이 모든 과정들을 알게 되었다면 그녀는 분명 떴던 눈도 다시 감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케이스는 단순히 한 가정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부시의 동생인 젭 부시(플로리다 주지사)가 안락사에 대한 이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그녀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가 되어야 했다. 그 사이 영양공급장치 튜브가 2번이나 제거 되었다가 다시 연결되는 비극적인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고, 10여 년간 병상을 지킨 남편 마이클에 대한 악성 스캔들이 쉼 없이 떠돌았다. 테리의 마지막 삶은 그렇게 한 여성의, 한 부부의, 한 가족의, 한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끊임없이 찔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결국 테리는 이 세상과의 끈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영양공급장치가 제거된 뒤 13일 만의 일이었다. 그녀가 사망하기까지 2주간 미국 내 언론은 그녀의 상태를 앞다투어 연일 가장 뜨겁게 다루었다. ‘리얼리티 쇼’도 이런 ‘리얼리티 쇼’가 없는 듯 했다. 미국 전역이(어쩌면 세계가) 한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 이것은 매우 비극적이면서도 이상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그 모든 과정이 ‘부활절’을 전후로 일어나다니! 예수의 부활을 기뻐하는 그 시간 동안 누군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시기의 아.이.러.니.

30년간 침대에 누워서 바다만을 꿈꾸어야 했던 한 남자

그러고 보면 <바다 속으로>의 라몬은 행복한 케이스였는지도 모른다. 신은 어쨌든 그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머리’와 ‘의식’은 남겨두었으니까. <떼시스><오픈 유어 아이즈>의 성공에 힘입어 할리우드로 건너가 <디 아더스>를 만들었던 스페인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그가 다시 모국의 언어로 돌아가 만든 최근작 <바다 속으로>(The Sea Inside - Mar Adentro)는 30년간을 침대에 누워서 바다만을 꿈꾸어야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젊은 시절 다이빙을 하던 중 머리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목 아래가 마비된 상태에서 살아야 했던 라몬 삼페드로(위 흑백사진은 실존인물)는 숨쉬는 머리와 죽어버린 몸을 가진 남자였다.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던 그였지만 라몬이 선택 한 것은 결국 몸의 상태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30년 동안 죽을 권리, 그것의 존엄에 대해 주장하던 그는 어느 날 친구의 도움을 받아 바다로 날아간다. 새처럼 자유롭게 비행하는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 어느 때 보다 평화롭다.

물론 미소 뒤에 감춰진 그의 삶은 고통과 좌절로 가득 찼겠지만, 그에겐 적어도 헌신으로 그를 돕는 형의 가족과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는 여의사, 그의 ‘능동적인 안락사’를 돕는 마지막 조력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죽음을 선택 할 수 있는 의지가 허락된 행복한 케이스였다.

오히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메기(힐러리 스웽크)의 삶이야 말로, 테리 시아보의 케이스에 더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멍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엄마를 위해 근사한 집을 사주고도 “돈을 주지 왜 이런 걸 물어보지도 않고 샀냐”고 핀잔만 들어야 했던 이 ‘백만 불짜리 아가씨’는 거친 시합 끝에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병원에 누워서 새된 호흡을 내쉬어야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등 도움도, 의지도 안되었던 이 파렴치한 가족들은 테마파크 T셔츠를 입고 나타나 메기의 입에 볼펜을 쥐어주며 각서에 싸인을 하라고 다그친다. 죽어가는 딸과 누이의 권리를 뺏으려는 그녀의 가족은 악마와도 같다. 결국 메기는 이런 악마들을 받아들이고 사는 삶 대신에, 더 이상 링 위로 뻗을 다리와 주먹이 없는 삶 대신에, 죽음을 택한다. 물론 프랭키(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메기의 안락사를 돕는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의료계에서는 의료시스템을 허술하게 묘사한 것과 함께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못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넓힐 것 같아 두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락사’란 여전히 섣불리 미숙한 주장을 펼치기 어려운 민감한 이슈다. 물론 프랭키의 결정이 옳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러 의견이 공존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적어도 그는 메기를 그저 방치해 두지 만은 않았으니까.

잔인함의 펀치들을 견뎌내기엔 나의 맷집은 겨우 1센트짜리란 걸 안다.

얼마 전 사랑했던 한 친구가 내가 어떻게 해도 손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장이 바닥아래로 떨어지는 기분과 동시에, 끝없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란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지금의 삶은 죽음에 가까운 지옥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지옥으로부터 끄집어 올릴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방치해 두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살아가기에 때론 우린 우리의 몸뚱아리 하나도 버겁다. 어쩌면 잔인해 진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무력감을 동반한 체념일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이 나에게 그런 방식으로 잔인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혹, 이 글이 법적인 자료로 가치가 있다면 이랬으면 좋겠다. 내가 불행히, 아주 불행히도, 의식이 닿지 않는 곳에서 숨을 쉬는 상태에 놓인다면, 내 삶을 결정할 어떤 능력도, 의지도 없게 된다면, 적어도 3년간은 내 몸과 이 땅의 연결고리를 임의로 끊지 않기를 바란다. 미안하지만 그 정도는 귀찮아 하지 말고 참아주고 노력해주면 좋겠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의학이 급진적인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당신들을 괴롭히지는 않겠다. 그것은 주제넘은 예의나, 당해보지 못한 자로서의 낭만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예의가 훼손되지 않는 최대치일 것이다. 림보에서의 휴식은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삶에 대한 미련으로 점철된 나 같은 인간에게 ‘행복한 죽음’이란 건 애초에 불가능 하겠지만 기약 없이 쏟아지는 잔인함의 펀치들을 견뎌내기엔 나의 맷집은 겨우 1센트짜리란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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