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외신기자클럽] 잊혀진 아랍의 영화들 (+불어원문)
2005-04-07
글 : 아드리앙 공보 (포지티브 기자. 영화평론가)
이집트 뮤지컬의 황금기를 되돌아보다

최근 파리의 아랍세계 연구소에서 있었던 회고전은 산업으로서의 세계 영화의 쇠락을 확인하게 해줬다. 영화 초기, 세계 각 지역은 연이어 작품을 만들어내는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었다. 각 지역은 세계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관객에게 선보였다. 그러나 미국과 인도 두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그라져버렸다.

‘영화산업’이라는 표현은 프랑스나 한국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 두 나라에서, 영화는 스튜디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화 제작사라는 곳에서 가내공업적인 방법으로 운영되었다. 영화 제작사들은 새로워지기 위해 재능있는 신인들을 끌어안으려 노력하지만 그들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에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카이로는 뭄바이나 할리우드 같은 영화공장이었다. 당시의 스타들은 2억에 달하는 아랍권 관객을 매혹시켰다. 영화사가인 조르주 사둘은 “1942년부터 몇몇 아랍국가에서 미국이나 유럽영화들은 일주일 이상 간판을 유지하지도 못한 반면에 이집트영화의 개봉작들은 수개월 동안 상영되기도 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어의 독특한 형식의 영화 속 아랍어는 젊은 세대들이 그것의 억양, 표현방식, 속어까지 차용하도록 영향을 주었다”라고 적고 있다. 1952년 카이로는 세계 4위의 영화수출 도시였다. 심지어 파리에서도, 몇몇 전용 상영관들 덕분에 이민자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들의 모험담을 뒤쫓을 수 있었다.

이집트영화는 인도영화와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뮤지컬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초창기에는 라디오 스타들의 얼굴이 알려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코미디, 탐정물 또는 멜로드라마, 각각의 영화들은 적어도 네 곡의 노래와 널리 알려진 춤추는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의 영향은 눈에 띄었다. 즉, 호화로운 장식과 배경의 무희들, 화려한 볼거리인 계단, 샴페인 잔들로 쌓아올린 분수, 반짝이 장식이 달린 드레스 등등을 볼 수 있다. 이집트는 그런 장식 속에서 부유한 나라처럼 자신을 드러냈지만, 그들 만의 춤과 노래로 자신의 특수성을 간직했다. 석유 유전 덕택에 발전한 이집트영화는, 그 당시 아랍 세계가 오늘날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엘도라도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에 자신의 영혼을 팔지 않고도 스스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이집트영화는 서구화에 관한 하나의 답을 제공했다.

몇몇 유명한 스타들이 카이로 출신인데, 특히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해진 오마 샤리프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아랍인들에게 가장 이름있는 스타는 파리드 엘 아트라슈이다.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의 명성은 꺼지지를 않는다. 매력적이고 코믹한 그는 30년 동안 40편 넘는 영화에서 연기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의 성공은 사미아 가말(사진)과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그들은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에 비견할 만한 듀엣을 이루었다. 아랍 춤을 전혀 모른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여전히 사미아 가말의 연기는 매혹적이다. 그녀는 투명한 천에 싸여 미소지으며 춤을 춘다. 또한 그녀는 바람결의 깃털같이 가벼워 보인다. 눈부시게 빛나는 동시에 편안한 그녀의 움직임의 유연함, 자연스러움, 아름다움, 그리고 관능미는 보편적인 우아함의 극치를 이룬다.

오늘날 미디어 속 아랍 국가의 이미지는 테러리즘, 전쟁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의 상승으로 요약되지만, 잊혀진 이 영화들은 잃어버린 지중해에 대한 향수를 깨운다. 또한 이 지역이 언제나 베일을 두른 여인들의 땅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할리우드가 메카시즘의 검열로 진창을 구를 때 그리고 헤이즈 코드의 인종차별주의가 유색 인종 배우들의 출연을 제한했던 시대에, 이 땅은 들뜬 기쁨의 영화, 사미아 가말의 벗은 몸매가 압도한 시기를 구가했다. 이 영화들을 다시 본다는 것은 어떤 문명도, 영화도 암흑상태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는 겸허한 교훈을 준다.


L’age d’or du musical egyptien.

Une recente retrospective a l’Institut du Monde Arabe a Paris permet de verifier le declin du cinema mondial en tant qu’industrie. Aux debuts du cinema, chaque region du monde possedait des studios qui produisaient a la chaine. Chacun donnait a son public une vision singuliere du monde. A deux exceptions pres (L’Amerique et L’Inde), tous sont morts. L’expression ≪ industrie du cinema≫ est inappropriee pour la France ou la Coree. Dans ces pays, le cinema est gere a la facon d’un artisanat, non par des ≪ studios ≫ mais par des ≪ maisons de production ≫. Elles s’efforcent d’integrer de nouveaux talents pour se renouveler, mais leur capacite est limitee. A l’inverse, des annees 40 aux annees 70, le Caire fut bien une usine a films comme Bombay ou Hollywood. Ses stars enchantaient quelque 200 millions de spectateurs arabophones. L’historien du cinema Georges Sadoul note que ≪ des 1942, dans certains pays arabes, un film americain ou europeen ne tenait pas l’affiche plus d’une semaine alors que les exclusivites des films egyptiens se poursuivaient pendant des mois. Et l’on voyait la langue arabe du cinema, forme particuliere de l’egyptien, influencer les jeunes generations qui adoptaient son accent, ses tournures, son argot. ≫ En 1952, le Caire etait le quatrieme exportateur de films au monde. A Paris meme, quelques cinemas specialises permettaient aux immigres de suivre les aventures de leurs vedettes favorites.

Le cinema egyptien, comme celui de l’Inde, etait avant tout musical. Il permit dans un premier temps de donner un visage aux grandes voix de la radio. Comedie, polar ou melodrame, chaque film comportait au moins quatre chansons et des numeros danses. L’influence de Broadway etait considerable : on retrouve des decors de luxe, des girls en arriere-fond, des escaliers spectaculaires, des fontaines de champagne, des robes a paillettes… L’Egypte s’affichait comme un pays riche dans ses decors, mais conservait sa specificite par sa danse et sa musique. Ce cinema, qui s’est developpe avec les puits de petrole, nous rappelle que le monde arabe tenait en ce temps le role d’Eldorado que tient aujourd’hui le monde chinois. Dans ce contexte, il offrait une reponse a l’occidentalisation, montrant aux spectateurs que l’on pouvait s’enrichir sans vendre son ame a l’occident.

Des quelques grands noms sortis du Caire, on a retenu Omar Sharif (grace a ≪ Lawrence d’Arabie ≫ notamment). Cependant, pour les arabes la grande vedette s’appelle Farid El Attrache. Trente ans apres sa mort, sa gloire n’est pas eteinte. A la fois seducteur et comique, il joua et chanta dans plus de quarante films en une trentaine d’annees. Son triomphe est inseparable de celui de Samia Gamal, avec qui il forma un duo comparable a Fred Astair et Ginger Rogers. Aujourd’hui encore, meme si on ne connait rien a la danse orientale, les prestations de Samia Gamal sont fascinantes. Elle danse, souriante, drapee de voiles transparents. Elle semble ainsi legere, comme une plume au vent. La souplesse de ses mouvements, son aisance, sa beaute, son erotisme a la fois eclatant et insouciant, atteignent une grace universelle.

Aujourd’hui que l’image du monde arabe dans les medias se resume au terrorisme, a la guerre et a la montee de l’islamisme, ces films perdus eveillent la nostalgie d’une mediterranee oubliee. Il faut se souvenir que cette region ne fut pas toujours la terre des femmes voilees. Elle vit triompher le corps fort deshabille de Samia Gamal, un cinema d’une joie dechainee, a une epoque ou Hollywood s’embourbait dans la censure du maccarthisme et le racisme du code Hayes, qui limitait la presence d’acteurs de couleurs a l’ecran... Revoir ces films est une lecon d’humilite : aucune civilisation, aucun cinema, n’est a l’abri des tenebres.

번역 진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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