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태양>은 태풍을 거쳐 태양을 맞이한 젊음의 이야기다. 공장직조된 교복만큼 평범하게 살아가던 고등학생 소요(천정명). 스케이터들을 캠코더에 기록하는 한주(조이진)는 변두리에서 서성이던 그를 인라인스케이트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책임감이 강한 갑바(이천희)와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를 지닌 모기(김강우)를 만난 소요는 인라인스케이트에 젊음을 걸기로 마음먹는다. 다만 청춘의 절정기란 금세 사라지기도 하는 것. 태풍이 몰아치면 아이들은 나이를 먹을 것이고 세상도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로 희망없는 소녀들을 감싸안았던 정재은 감독은 인라인스케이트에 두발을 담고 길거리를 질주하는 청춘군상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카메라는 지나치게 흔들리지도, 쓸데없는 장난을 치지도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고 직사광선을 직시하던 카메라는 터져나올 듯한 젊음을 있는 그대로 건져내고, 그렇게 생생한 프레임 속에는 젊은 네명의 배우 김강우, 천정명, 이천희, 조이진의 에너지가 있다. 도봉산역 근처의 익스트림 스포츠센터로 가는 동안, 열린 장소에서 네명의 청춘을 만난다는 사실에 조금 설레는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마약상 10대가 등장하는 미국 인디영화의 무대로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장소다. 시설 개보수 중이라는 메모지가 휘날리고, 담장 하나를 마주한 음식물 쓰레기 하치장으로부터 풍기는 달짝지근한 냄새. 태양마저 구름 속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배우들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끌벅적한 젊음의 소리. 그들이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직사광선이 구름 사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뜨거워졌다. 냄새는 여전했지만 참을 만도 하다 싶어졌다. 그러고보니 颱. 風. 太. 陽. (멋대로 해석하자면) 거대한 바람에 대항한 뜨거운 젊음의 이야기 아닌가.
배우들에게 쉬는 틈을 이용해 번갈아가며 인터뷰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그 순간 그들은 재빨리 의상을 갈아입은 사람이 먼저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그리고 집에도 빨리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밴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네명의 청춘들. 싱싱한 8개의 다리가 뛰어가는 소리에 인라인스케이트의 바퀴가 콘크리트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겹쳤다. 소리들은 그들의 목소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천정명, 김강우, 이천희, 조이진. <태풍태양>에 기꺼이 여름을 바친 네명의 젊은이들이 쓰레기 하치장 옆 공터에 맥박을 불어넣은 3월28일 오후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준비된 신인, 성큼성큼 다가오다 _ 김강우
“내가 나가면 다른 사람이 1등을 못하잖아. 너무 잘 타도 안 좋은 거야.” - 모기
<네멋대로 해라>의 박성수PD가 차기작으로 <나는 달린다>를 결정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에릭을 주인공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정작 뚜껑을 열자 주인공 신무철은 김강우였다. 작품 속에서 독서광이며 용접공이던 신무철의 독특한 캐릭터만큼 김강우가 보여준 무뚝뚝한 리얼리티도 시청자들에게는 신선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기에 뛰어들어 졸업은 8년만에 올해 겨우 했다"는 그는 중앙대 연극학과와 연극무대를 거쳐 충무로에 입성했다.
무철이 아니더라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해안선>에서 장동건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반기를 드는 후임병, <실미도>에서 설경구와 정재영의 마지막 권유에도 끝까지 버티는 막내 훈련병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세칭 쎈 영화들로 시작한 이유를 묻자 "일명 군대영화로 스크린에 입문한 것은 무명의 젊은 배우가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이, 많은 배우를 한꺼번에 발탁하는 오디션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덤덤하게 답한다.
정재은 감독의 <태풍태양>에 이르기까지 강우석, 김기덕이라는 강력한 연출자들에게 트레이닝된 그는 “최소한 다음 작품부터는 몸은 쉽겠지. 연기는 갈수록 더 어렵겠지만 육체적으로는 더 힘들지는 않을 테니까 후회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말은 그래도 <태풍태양> 촬영 와중에도 TV드라마<비천무>의 악역 사준을 맡아 중국에서 혹독한 6개월을 보낸 사례는 김강우의 연기에 대한 욕심을 보여준다. 보헤미안, 아웃사이더지만 인라인에 대해 갈증과 두려움을 모두 안고 살아가는 <태풍태양>의 모기는 그래서 그를 닮았다. 무뚝뚝한 김강우의 황소같은 눈망울은 어느 순간 날카롭게 번득인다. ‘고요 속의 들끓음’을 느끼도록 하는 대어급 신인의 다음 행보는 아직 제목을 밝히지 않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당돌한 CF퀸, 성격을 드러내다 _ 조이진
“우리가 한 천번쯤 사랑을 하게 되면 천개의 세상을 알 수 있게 될까?” - 한주
가나초콜렛이 채시라와 이미연을 우리에게 소개했다면, 젠느초콜렛은 조이진을 발견했다. 젠느초콜렛 광고모델 컨테스트에서 3000대1의 경쟁율을 뚫고 첫발을 내딛은 그녀는 이후 KTF, 베이직하우스, 메이폴 광고에서 연타석 안타를 날리며 일약 CF퀸으로 떠오른다. 히트작 OB맥주 광고에서 태양 아래 몸을 누이고 남자친구들에게 "니들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어"라고 당돌하게 묻던 그녀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어그레시브 인라인의 상징격인 하프파이프에서 이뤄진 <태풍태양>의 표지 촬영현장. 쌀쌀한 날씨에 이상한 냄새마저 뿜어나오는 악조건에서도 포즈를 요구할 때마다“네!”라고 높은 톤으로 상쾌하게 대답하는 조이진. 스물셋을 맞은 그녀는 인라인 스케이팅에서 옆으로 발을 뻗는 스트로크 동작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요조숙녀>로 브라운관에 노크했고 <유리화>로 이제 터를 닦은 그는 주인공에게 위안을 주는 밝고 털털한 주변인물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 <태풍태양>에서 그녀는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비디오그래퍼 한주를 맡았다. “이건 스타일이 중요한 거야, 시선에서 손끝까지”라고 신참 소요에게 타이르듯 이야기하는 <태풍태양>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 한주는 적극적인 성격의 조이진을 드러낸다.
김병서 촬영감독이 세밀하게 잡아낸 영화속의 그녀는 중성적이면서도 자기확신이 강하다. 이제까지의 성격좋은 캐릭터들과는 다른 자기 세계가 분명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영화 속 인라인은 진학, 취업처럼 20대 초반이라면 누구나 겪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자신의 스크린 데뷔작을 설명하는 그. 조이진은 “주위의 만류에도 과감히 이 길을 택한 스스로”에 대해 어둠 속에서 그를 평가할 관객 속으로 뛰어든다.
근사한 남자, 오늘을 기다렸다 _ 이천희
“난 스케이트 타면서 목표가 생기게 된 것 같아서 좋다. 미래를 만들게 된 것 같아.” - 갑바
값나가는 슈트를 걸친 근사한 몸매의 이 남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빙우> <바람난 가족>과 <늑대의 유혹>에서는 아니다. 몇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등장했던 배우 이천희는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다. 뒤늦게야 <늑대의 유혹> 시사회에서 강동원의 옆에 서 있던 날카로운 눈매의 신인배우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내 인상을 날카롭게 보는 편이다. 사실 나는 낯가림도 없고 털털한 인간인데.” (웃음) 연극이 너무 하고파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갔었다는 그에게 꽤 잘 나갔던 모델 경력을 끄집어냈더니 “모델 일은 도대체가 당기지 않았다. 나는 연극배우지 모델이 아니야! 하고 매일매일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그 옛날의 다짐은 <태풍태양>으로 다부지게 실현될 참이다. 그는 스케이터들의 정신적 지주인 ‘갑바’를 연기했다. 공개 오디션을 통해 막판에 투입된 이천희는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사려 깊게, 청춘 군상 속에서 강한 원심력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평생을 기다려왔던 역할일는지도 모른다.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6∼7년 전부터 인라인스케이트의 매력에 빠졌던 그는 “언젠가는 써먹을 때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모르는 사이에 미래를 준비해왔던 행운의 인간들을 보며 질투를 느낄 때가 있는데, 이천희를 인터뷰 하던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미래를 준비하기는 하는데. 글쎄, 뭔가 오겠지. (웃음) 지금 당장은 뭔지 잘 모르겠다.”. 이천희는 갑자기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언급하며 작은 스쿠터로 전국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예측 불가능한 것이야말로 진짜 청춘. 다만 이제는 슬슬 배를 띄울 만한 바람이 불고 있다. 파도가 좋은 <태풍태양>은 이천희의 앞날을 위한 출발항이다.
천진한 소년, 악바리가 되다 _ 천정명
“평생 깁스도 못해보고 사는 사람도 많겠지? 평생 무사고 말이야.” - 소요
천.정.명. 천진하고 정직하고 명랑하다는 뜻인가. 이런 이름을 가진 남자라면 영원히 소년으로 머무를 운명을 지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보다도 대여섯살은 어려 보이는 눈매에 드라마 <학교2>와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의 구김살 없는 역할들이 겹친다. 누구라도 “세상이 항상 여기만큼 안전했음 좋겠다. 형들이 항상 지켜줘”라고 말하는 소요 역에 쉽게 천정명을 떠올렸을 것이다. 조금은 힘이 없어 보이고, 조금은 야심이 부족해 보이는 소년. 심지어 천정명이 애초에 자원했던 역할은 주인공도 아닌 조연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들 주인공을 하려고 하는데 나만 조연을 하겠다니까 감독님은 그게 신선했나보더라”며 오디션 당시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야심없는 젊음이라 쉽게 단정짓는 것도 섣부른 오해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처음으로 신어봤던 그는 4개월 만에 프로급 이천희를 주행에서 따라잡을 실력이 되었다.
극중의 연습장면을 위해 100번 이상 넘어지면서도 “제대로 배워서 크게 다칠 염려는 없었다”고 태연히 말하는 그다. 소년의 얼굴에 담긴 악바리 근성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배우 천정명을 제대로 써먹는 방법을 터득한 이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역이다. 더 크면 이런 역할 언제 해보겠나.” <태풍태양>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요는 ‘형들’을 잊고 낯선 태양 아래 홀로 선다. 그건 바로 배우 천정명의 앞날이기도 하다. 젊음의 직사광선을 맞으며 미래를 위한 광합성을 진행 중인 남자. “젊다는 건 열정과 희망이 있다는 뜻인 것 같다. 그건 삶에 대한 목표가 있다는 것 아닐까?” 태풍이 지나고 태양이 쏟아지자 소년은 가고 마침내 남자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