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자전 다큐 <끔찍하게 정상적인> 셀리스타 데이비스 감독
2005-04-12
나를 성폭행했던 그 남자 앞에 섰다 카메라를 들고”
셀리스타 데이비스 감독

25년이 흘렀다. 하지만 시간은 성추행의 상처를 치유해주지 않았다. 성추행 피해자는 자신을 성추행했던, 어머니 친구의 남편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그’를 만나기로 결심했고, 그 길에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셀리스타 데이비스(32·미국)는 그렇게 영화감독이 됐고, 자전적 다큐멘터리 <끔찍하게 정상적인>을 들고 8일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를 찾았다.

영화 속에서 셀리스타 감독과 또 다른 피해자인 언니, 그리고 가해자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성추행 사건의 진실은 이렇다. 셀리스타 감독은 대여섯살 무렵 가족 피크닉에서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는 “보여줄 게 있다”며 셀리스타를 방으로 데려갔고, 바지 지퍼를 내린 뒤 ‘보여주겠다던 그것’을 셀리스타의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셀리스타의 언니도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를 마주 대하는 것 이외의 모든 방법을 다 써봤지만 상처를 치유할 수 없었어요. 그를 만나 그가 나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자백받은 뒤 상처를 털어내고 싶었지요. 또 무엇이 두려운지도 모른 채 불안 속에 침묵하고 있는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영화를 만드는 일은 ‘그’를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인 언니와, 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한 어머니가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했고, 영화를 완성할 때까지 든든한 후원자가 돼줬다.

감독은 긴장과 망설임, 눈물과 고뇌 속에 그를 찾아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가해자는 자매들과 만난 자리에서 카메라를 끄게 한 채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털어놓는다. “그때 나는 내가 아니었다”거나, “내가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겠느냐”는 변명의 말도 잊지 않는다. 그의 자백과 변명은 검은 화면 속 음성만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셀리스타 감독은 “그 남자가 카메라 앞에서 정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촬영 당시에는 그를 용서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서 ‘정말 화해가 가능할까’ 싶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감독은 “중요한 것은 영화 촬영 뒤 ‘세상의 모든 남자는 위험하다’는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것”이라며 “이제야 비로소 남자와 성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들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셀리스타 감독은 “성추행 피해자들마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가해자를 만나기로 결심하고, 그를 찾아가 만나고, 영화를 통해 그 과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적어도 나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며 잊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 상처를 씻지 못하는 성폭력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또다른 길을 제시했다.

“아버지는 우리 자매에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를 대하라’고 타일렀고, 그와 변함없는 친분관계를 유지했어요. 어머니는 몹시 분노했지만 성추행 사건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한 나머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요.” 감독은 “부모들의 부당한 태도가 나와 언니를 더욱 슬프고 병들게 만들었다”며 “부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을 보호해야 하며, 이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절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13일 한국을 떠나는 셀리스타 감독은 끝으로 “관객들의 여성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따뜻한 관심이 나를 흥분시켰다”며 “피부색이 다른 30대 독신 여성 5명의 이야기를 담은 새 작품을 들고 내년에 다시 여성영화제를 찾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글·사진 한겨레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