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하의 C&C]
[백은하의 애버뉴C] 21st street / 동성동본 동명이인 초비극 러브스토리
2005-04-12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나는 비극의 백은하일까, 희극의 백은하일까.

왁자지껄한 뉴욕의 레스토랑. 함께 저녁을 먹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희극과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내 같은 듯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일단 첫 설정은 동일하다. 저녁파티가 한창인 어느 집. 불쑥 한 명의 불청객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그 여자의 이름은 멜린다. 그리고 멜린다는 문을 열자마자 테이블 앞에서 쓰러진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단발머리의 멜린다는 즉흥적이고 실수투성이 여자지만 사랑스러운 연애를 하게 되고, 곱슬머리 멜린다는 충동적이고 사고를 몰고 다니는 여자로 결국 우울한 연애의 끝을 보게 된다. 로맨틱 코미디와 비극적 러브 스토리. 이것은 바로 최근 개봉한 우디 앨렌의 신작 <멜린다 & 멜린다> (Melinda and Melinda) 속 두 가지 이야기다. 액자구성으로 되어 있는 영화는 이렇듯 두 명의 서로 다른 멜린다 이야기와 레스토랑에 모인 시나리오 작가들의 입담 사이를 지그재그로 오고 간다.

뉴욕, 하면 대부분 마틴 스코시즈, 짐 자무시, 스파이크 리 같은 감독의 이름이 떠오를 테지만, 이 도시에 대한 사랑에 평생을 건 사람을 꼽으라면 뭐니뭐니 해도 우디 앨런이다. (그가 아놀드 슈워제네거였다면 뉴욕시장이 됐을텐데! ) 실로 뉴욕에 살기 시작한 이후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복습하다 보면 이 도시가 지난 반세기 동안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애니씽 엘스>를 비롯한 그의 최근작들이 젊은 시절 만든 천재적인 문제작들에 비하면 다소 심심한 건 사실이지만, 올해 일흔이나 된 이 할아버지가 노령에도 불구하고 연말 세금 정산하듯 일년에 꼬박꼬박 한 편씩 영화를 찍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고맙다. 40편 가까이 되는 그의 모든 작품이 수작은 아니지만, 그 어떤 작품도 졸작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멜린다&멜린다>를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재능은 세월이 갈수록 구수하게 익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뜬금 없이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저 ‘희극의 멜린다’와 ‘비극의 멜린다’가 어느 날 마주친다면 어떨까?. 영화에서처럼 웨스트 빌리지의 어느 와인 바에서 우연히 맞닥뜨린다면 이 이야기는 과연 비극으로 풀릴까, 희극으로 풀릴까. 사실 세상 어딘가에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이런 상상의 원천은 바로 에리히 케스트너의 <헤어졌을 때 만날 때>였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에이브 전집’에서 였는데 보통은 <로테와 루이제> <두 로테>등으로 알려져 있다).

또다른 나를 만나는 이야기

여름캠프에 간 두 소녀는 똑같이 생긴 서로를 발견하고 놀란다. 아기 적에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떨어져 살았던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왔던 것. 처음엔 서로에게 적대감을 보이던 두 소녀는 이내 엄마와 아빠의 재결합을 위해 의기투합한다. 이 흥미롭고 귀여운 이야기는 1961년에 <페어런트 트랩>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고, 6-7년 전에는 앳된 얼굴의 린지 로한의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이 단순한 이야기가 시대를 초월하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상황이 어느 누군가에 의해 끊임 없이 꿈꾸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어느 순간부터 또 다른 내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멈추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희망하고 바랬던 사실이 갈수록 조금은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이런 골치덩어리 인간이 하나 더 있다니 사양하겠어, 하는 마음이었는지, 나를 반으로 나누고 쪼개서 생각하기에 이미 스스로가 견고하게 커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내가 몇 년 전에 이 한 통의 이 메일을 받았을 때, 반갑기보다는 다소 섬뜩한 기분이 들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백은하에게 메일을 받다

보내는 사람 이름이 ‘백은하’로 되어 있는 메일. 이름이 같아서 글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고 이야기하던 그와 나는 몇 통의 이 메일을 서로 주고 받았다. 이름이 같아 생겼던 사소하지만 동일한 경험 등을 나누며 즐거워하기도 했지만, 어떤 메일의 끝에 “혹시 내가 남자가 아닐까요?” 라는 의문을 붙여서 ‘동성동본동명이인초비극러브스토리’의 시나리오를 혼자 쓰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처음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너무 많이 긴장 했었다. 도플 갱어처럼 얼마 후 누구 하나 죽어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걱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안녕하세요, 백은하예요” 라고 인사하며 다가오는 그를 향해 “푹-“ 하고 웃음이 났었다. 그녀는 나보다 3살이 많은, 실망스럽게도 여자였으며, 다행스럽게도 한 눈에 보기에도 너무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 떨어진 꽃잎으로 아크 웍을 하는 이 ‘꽃도둑’ 은 나보다는 580배 민감하고 순수한 감정의 소유자였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는 아주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상상 이상으로 닮은 점을 많이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고,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생각되는 점도 많았다. 그리고 우연히도 지금 그녀는 또 다른 책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뉴욕에 와 있다. 그러니까 이건 완벽한 상황인 것이다. 로케이션까지 뉴욕이라니!. ‘백은하 그리고 백은하’ 우리의 삶 속에서 진짜로 진행되고 있는 영화의 제목. 그나저나 흠… 나는 비극의 백은하일까. 희극의 백은하일까. 이 영화의 장르나 엔딩은 눈 감고 난 후에나 판명이 나는 것이니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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