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찾아가리, 외롭고 험해도~
“떨려서….” 구성주(42) 감독은 말끝을 흐렸다. 3월25일, <엄마>의 첫 시사를 앞두고 배우들과 함께 나란히 선 자리에서 그는 인사랄 것도 없는 세 음절을 내뱉고 발언을 그쳤다. 그리곤 숱없는 머리만 연신 매만졌다. 데뷔작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를 내놓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이제야 세상에 두 번째 영화를 내놓게 된 자신이 쑥스러워서였을까. 아님, 또 다른 이유에서였을까. 감독의 통통한 볼은 좀처럼 홍조를 떼내지 못했다. 구성주 감독을 만났다.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나타난 그는 인터뷰 도중 “<엄마>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니네. 불우한 충무로 감독의 초상화 같은 기사 쓰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8년 전에도 <씨네21> C기자인지, N기자인지가 살살 긁어서 결국 이런저런 이야기 다 했더니 나중에 데뷔 수난기가 됐던데. 이번 기사는 2탄인 모양이네. 당한 게 있어서 이번엔 말 안 할래요. 하하.” 그에게서 지난 8년의 이야길 듣기란 수월하지 않았다. 인터뷰는 술자리로 이어졌고, 알코올 기운을 빌려서야 그는 과거에 대한 기억들을 조금씩 게워냈다. 망각의 지층에서 어렵사리 캐낸 그의 기억들은 이미 메말라 푸석거렸지만, 여기서 멈춰서면 끝일지도 모른다는 지난 8년 동안의 불안은 군데군데 번들거렸다.
“이리 나와, X발. 어떤 놈인지 한번 붙어보자!” 2001년 여름, 구성주 감독은 귀신과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욕망은 시들해지고, 무기력의 수렁으로 깊숙이 빠져들던 그때, 그는 매일 헛것을 봤다. 악몽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왔다. 귀신은 대낮에도 불쑥 찾아와 식은땀 흐르는 그의 등을 툭툭 쳐댔다. “누군지 확인하고 싶은데 고개가 안 돌아가더라.” 더이상 뒷걸음질할 수 없는 코너에 몰려서였을까. “이러다간 내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위기감까지 들었다”는 그는 혼잣말을 하며 허공에다 헛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싸운 뒤에야 한달 동안의 환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마흔 넘은 아들의 사투를 말없이 바라봐야 했던 그의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8년전 데뷔작 참패, 프로듀서 제작비 들고 튀고
먼길 돌아돌아 <엄마> 품에 안기기까지, 자그마치 8년이다. 구성주 감독이 데뷔작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를 내놓은 때가 1997년. 그때만 하더라도 두 번째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그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하일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 대해 당시 평단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관습적인 상업영화 일색인 풍토에 실험의 기운을 불어넣었다며, 신인감독의 무모한 용기에 관심을 보였다. 개봉일에 대한극장에 들른 부모님이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서 어쩐다냐”라는 걱정을 늘어놓았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남의 영화 보러 온 사람”처럼 뚱하게 극장 앞에 서 있다 친구들과 어울려 돈암동 술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에 만들 영화에 관한 이야길 안주 삼아 술을 펐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외로 참혹했다. 서울 관객 수 1만1813명. 초라하기 그지없는 성적표였다. <비트>와 <산부인과>가 극장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무렵, <그는 나에게 지타를…>은 관객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애 아버지는 김영삼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지금은 대통령을 하고 있어요.” “사실은 김대중 씨 아들이에요.” 극중 대사가 심의 과정에서 국가 원수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말썽을 빚어 결국 삭제되는 등 개봉 직전 영화는 원치 않은 화제를 불러모았지만, 이마저도 흥행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프로듀서가 제작비를 들고 야반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급기야 스스로 하루 촬영 비용 기백만원을 꾸기 위해 레디고를 불러놓고 친구에게 전화해 애걸복걸해서 겨우 만들었던 데뷔작은 그의 말마따나 이제 ‘희귀영화’로 남았다.
시나리오 줄줄이 문전박대 ‘체념의 나날’
감독 데뷔가 고시 패스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안다. 입봉보다 두 번째 작품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렵게 된 충무로 풍토에서 닥쳐온 모든 시련은 그의 몫이었다. 충무로 트렌드에 반기를 들었다는 칭찬은 외려 뗄 수 없는 혹이 됐다. “하루도 쉬지 않고 써내려갔다”는 그의 시나리오들은 번번이 제작사 문전에서 퇴짜를 맞았다. “영화제용 영화 만들려고 하냐?”는 비아냥은 수도 없이 들었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일에 회의를 느낀 한 악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로드무비 <아사토마>는 관심을 보인 영화사가 있어 둥지를 틀긴 했지만 1년을 채 버티지 못했다. “옆에 대형마트들이 생기는데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팔려고 하니 되나.” 그가 출퇴근하던 작은 영화사는 얼마 되지 않아 산업화의 빅뱅 시기로 돌입하던 충무로의 소용돌이를 견디지 못하고 흔적없이 사라졌다.
숨겨둔 비장의 무기도 소용없었다. “이 정도면 충무로 제작자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 중에 초고를 써뒀던 <크리스마스 레퀴엠>을 꺼내들었지만, 충무로 제작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예산영화라 관심가질 만한 곳이 있겠다 싶었는데…” 그러나 “시체가 잔뜩 나오는” <크리스마스 레퀴엠>을 받아들일 만큼 충무로가 여유롭진 않았다. “이걸 계속 해야 하나” 망설일 무렵, 그에게 연출제의가 들어왔다. 제작자가 신출내기는 아니었고, 꽤 그럴싸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작자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한 스탭은 문제의 제작자에게 500만원을 빌려줬고, 출연하기로 한 여배우 또한 1500만원을 내줬다고 했다. 두 번째 작품을 만들 기회를 잃었지만, 그는 뜯길 돈이 없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불안과 무기력의 나날들은 결국 체념을 낳았다. 귀신에 사로잡힌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영화 만드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는 이들에게 찾아가 부탁하기도 싫었다. 구걸하는 것 같았다. 그런 내가 싫었고, 모멸스러웠고, 한심했다. 그렇게 5년 정도 보내고 나니 이렇게 된 거, 뭐 이렇게 살지 싶더라.”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프랑스 문화원을 들락거리던 영화광 출신 감독에게 언제나 힘이 됐던 거장들의 수난 복음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페데리코 펠리니도 <길>을 찍기 위해 10군데가 넘는 영화사를 전전해야 했고, 데이비드 린도 <인도로 가는 길>을 찍기 위해 14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거장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남 이야기일 뿐이었다. “웬만해선 집 밖에 나가지 않는 은둔의 시절”이 도래했다.
늦깍이 연애, 충무로를 향한 열정을 살리다
그런 그를 곁에서 말없이 위로해준 건 TV였다. “하는 일이 없으니까 만날 그 앞에 앉는 거지, 뭐.” 그러다 <인간극장-추씨 할머니의 백리길>을 봤다. 어지럼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가 아들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대장정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너무 예뻐 보였다. 저거 영화구나” 싶었다. 기회가 되면 시나리오로 옮겨야겠다고 맘먹었지만, 곧바로 실행하진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마흔 다 되어 후배 소개로 미팅을 했는데 여자쪽 주선자로 나온 사람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 여자도 별난 취향의 소유자였는지 돈도 없고 머리털도 없는 나한테 호감을 보이더라.” 느지막이 찾아온 마지막 연애는 발길 끊었던 충무로로 그를 떠밀었다. 다시 출발점에 선 기분이었다.
식었던 영화에 대한 열정도 슬슬 타올랐다. “데이트 때마다 매번 얻어먹는 게 눈치가 보였다.” 장선우 감독의 연출부 시절 동고동락했던 장문일의 <행복한 장의사>와 심광진의 <불후의 명작>에 단역으로 출연한 이유가 “단지 연애자금 마련을 위한 것”이라지만, 곁눈질로나마 맛봤던 촬영장의 생기가 축 늘어진 그를 들뜨게 했음이 분명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멋스럽다. <속 석양의 무법자>를 수십번 돌려보면서 세르지오 레오네의 자리에 매번 나를 대입시켰다.” 그러나 현실이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컨셉이 분명한 기획영화를 원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가슴에 묻어뒀던 지금 <엄마>가 된 <먼길>이었다. “간단한 시놉시스만 갖고서 K영화사에 찾아갔다. 대표를 만나 흥행이 가능한 소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무팀에선 더 많은 에피소드와 캐릭터와 해프닝을 원했다.”
서너 차례 자리가 마련됐지만 결국 결렬됐다. “길 자체가 주제고, 형식이고, 감동인 순수하고 담백한 로드무비”를 꿈꿨고, 해남에서 목포까지, 막내딸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200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 나선 엄마의 여정에 봄 만난 개구리마냥 펄쩍펄쩍 돌출하는 판타지를 심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들 그랬다. 허수아비는 뭐냐? 브라스 밴드는 왜 갑자기 튀어나오냐?” 제작자들은 모두 이야기 도중 펼쳐지는 상징과 판타지에 대해 꺼려했다. 그러나 그는 그걸 빼내고 메가폰을 쥐긴 죽어도 싫었다. “영화 속에서 허수아비는 바로 나다. 뜬금없고, 엉뚱하고, 비현실적인 캐릭터. 나는 지금까지 허수아비처럼 세상을 살았다. 세상이 싫었고 외면하고 싶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 발딛는 게 무섭고 두려웠다. 오죽했으면 태어날 때 12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버티다 나왔겠나. 거짓말 아니다. 성룡도 그랬고, 전에 <가요무대> 보니까 가수 최진희도 그랬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