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배우 장동휘가 4월2일 밤 9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살. 고관절 수술로 인한 합병증으로 지난 4년을 투병했던 그는 두달 전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됐고,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원로배우 황해를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비보가 날아들어서였을까. 빈소가 마련된 서울 삼성병원을 찾은 영화인들은 어느 때보다 숙연했고, 침울했다. 4월5일 영화인협회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엔 신영균, 남궁원, 안성기, 이덕화 등 동료, 후배 연기자들과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황기성 서울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등 영화계 인사들이 자리해 부인 조원희(77)씨를 비롯한 유족들의 오열을 나누고, 달랬다. 박준규는 중절모 쓰고 머플러 두르고 파이프 물고 카리스마 내뿜던 고인의 영정 앞에서 10년 전 아버지 박노식의 영면을 떠올리며 “생전에 스타였던 두분 모두 사람들이 산을 찾는 식목일을 골라 똑같이 땅에 묻히시는 걸 보면 대단한 양반들”이라는 말로 슬픔을 애써 지웠다.
박노식, 허장강, 황해 등과 1960년대 대표적인 액션배우로 군림했던 장동휘는 1920년 인천 율목동 9번지에서 태어났다. 인천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극장에서 본 악극에 매료되어” 스무살 되던 해 콜럼비아에 입단했고, “국내와 만주를 넘나들며” 무대에 섰다. 배우 윤일봉의 추천으로 1957년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의 영진 역을 맡으면서, 서른일곱에 뒤늦게 영화 인생을 시작한 그는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분대장 역할을 맡으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국도극장에서 개봉, “당시 전쟁물로서는 가장 많은” 23만여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던 이 영화에서 그는 죽음의 공포에 떠는 전우를 다독이는 인간적인 분대장으로 열연했다.
1994년 윤정희와 함께 출연한 <만무방>까지,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가 남긴 영화는 500여편. 남성적 장르인 전쟁물과 액션물에서 그의 개성이 가장 빛났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다. 올해 이만희 감독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장동휘가 출연한 영화들을 다시 봤다는 부산국제영화제 코디네이터 조영정씨는 여기에 흥미로운 해석을 덧붙인다. “당대의 액션배우들은 맨주먹으로 세상과 맞서면서 터프함을 과시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반면 그가 맡은 인물들은 눈물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권철휘 감독의 <북경열차>(1969)를 보면, 그는 극중에서 자신의 죽음을 순수하고 가련한 소녀의 죽음으로 비유하기까지 한다.” 조씨는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세상의 규칙을 초월한 단독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며 그를 험프리 보가트에 비유했다.
쉰이 넘어서도 촬영현장에서 팔씨름 내기 하면 진 적이 없었고, 지방 로케 가서도 시비 거는 깡패들을 손쉽게 제압했으며, 스트라이프 양복 구겨진다며 촬영 중에 절대로 앉지 않았다는 일화를 남긴 그는 평생 영화 외길만 고집했다. 1970년대 들어 TV의 위세에 밀려 영화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음반 취입 등 갖은 유혹이 쏟아졌지만, 그는 부도난 영화사의 영화에 무료 출연하면서까지 충무로를 지켰다고 한다. 안성기는 “영화 속 모습하고 실제 삶하고 너무 비슷한 분이었다”며 “배우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서는 등 평소에도 맏형 노릇을 했다”고 전했다. 윤일봉도 “인기나 돈에 연연해하지 않고 평생 배우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라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