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애의 목적>의 배우 박해일
2005-04-14
글 : 이혜정
글 : 박혜명
“연기는 즐겁지만 두렵다”

지난 3월24일에 크랭크업한 영화 <연애의 목적> 쫑파티 자리에서 박해일은 제작사 싸이더스의 직원에게 인터뷰 하나만 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숨돌릴 새 없이 차기작 <소년, 천국에 가다>를 촬영하게 됐는데, 몰입이 쉽지 않다고, 인터뷰를 씻김굿 삼아 자신의 몸에 물들어 있던 주인공 유림의 얼룩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 젖었어요?” <연애의 목적>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첫 대사다. 스물여섯된 고등학교 영어교사 이유림이 스물일곱의 교생실습생 최홍(강혜정)에게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건네는 말. <연애의 목적>은 맘에 드는 여자 앞에서 ‘한번만 같이 자자’고 애처럼 조르는 남자와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걸 왜?’라고 묻는 여자의 팽팽하고 제법 아찔하며 리드미컬한 연애담이다. 박해일이 연기한 유림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들과 좀체 묶이지 않는다. 차이는 있지만 전작의 캐릭터들은 공통적으로 그에게서 맑은 얼굴과 깊은 음성, 안으로 접어들어가면서 부피가 커지는 존재감을 빌려갔다. 유림은 이기적일 만큼 욕망에 충실하고 대책없이 일을 저지른다. 밖으로 펼쳐 보이면서 자리를 넓혀가는 존재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로 데뷔해 벌써 여섯편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박해일에게 유림은 이면이라기보다 없을 것 같은 면에 가깝다.

영화가 개봉하는 6월이면 우리에게도 그 새로움이 확인되겠지만, 낯선 인물과 현장에서 4개월을 씨름한 그는 이미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질투는 나의 힘> 때 수줍게 안면을 익힌 기자에게 몇톤 밝아진 인사를 건네고, “내 말이 느려서 노트북으로 받아 치기도 편할 것”이라는 얘기와 달리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오랜만에 하니까 인터뷰가 어색하다”며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어깨를 들썩이기도 했다. 박해일은 물감색을 솔직하게 발해내고 그릇의 모양대로 움직여주는 물이 아닐까 싶다. <소년, 천국에 가다> 촬영이 끝나면 올해 안에 봉준호 감독의 신작 <괴물> 촬영 스케줄도 맞물려 있다는 얘기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크랭크업 기념’으로는 좀처럼 없는 배우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잡아달라고 했다던데.

=시쳇말로 ‘썰을 푼다’고 하지 않나. (웃음) 수다떨면 편해지니까. 그게 새 영화를 들어가는 입장에서는, 새로운 거 시작할 때 덜어내는 거 같기도 하고. 속에 있던 거 끄집어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인터뷰밖에 없을 거 같더라. 이번 영화는 이렇게 찍었습니다, 하는.

-그러면 <연애의 목적>을 크랭크업한 소감.

=4개월여간의 촬영 기간 동안, 새로 만난 사람들과 적응의 시간도 갖고 역할에 대한 이해도 충분히 하고 갔어야 됐는데 시작이 급작스러웠던 게 사실이고, 신중해야 할 시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중간에 스케줄에 허덕이고…. 하루하루가 가는 데 더딤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끝내고 나니까 그 시간이 정말 빨리 갔더라. 결론은, (웃음) 아쉽고 털털하고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는 작은 후회들도 있고 속시원하기도 하고.

-출연을 결정한 이유를 듣고 싶다. 노출신도 노출신이지만, 중반까지의 분위기 자체가 성에 대해 매우 노골적이고 유림은 그 노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다.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대사가 꽤 라이브했다. 대사량도 굉장히 많고. 박해일 네가 유림이라면 그런 라이브한 것들을, 문자상의 것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 같나라는 의문이 들어 계속 읽어봤다. 세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내 자신을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바꿔 상대방을 설득시켜보든가 그렇게 이끌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해일씨, 나라면 이렇게 할 거 같아라는 도움. 시나리오를 감독이 다른 작가와 함께 썼고 젋은 사람이라 모델이 되기에 편했다.

-영화배우로서 먼 미래를 생각했을 때, <연애의 목적> 같은 영화는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결정했을 것도 같다.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이 먼저였고, 사회적으로 좀더 많은 게 배치되는 나이가 되기 이전에 해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무모하리만큼 그런 측면이 있는 캐릭터니까 나이가 더 들어서하게 되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아무래도 연기도 걸러서 나오게 되니까.

-유림에게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연기했나.

=갖고 하려고 했다. 그래야만 됐다. (웃음) 힘들었다는 거다. 얼마만큼 이해를 해야 하는지 그 수위가 어려웠다. 어느 한곳에서 탁 튀어버리면 확 달라질 수 있다, 그 캐릭터는. 지뢰밭 같은 캐릭터다. 잘못 밟으면 펑 터지는. 너무 가학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뒤로 빼도 안 되고.

-유림과 홍이 술집에서 대화하는 장면 같은 건 실제로 술을 마시면서 촬영했다던데.

=혜정씨랑 같이 마시면서 했다. 술 안 먹고서 만들어내기엔 대사들이 너무 장문이니까. 그리고 단시간에 설득을 해낼 수 있으면 재미없다. 밀고 당기기. 넘어왔다가 안 넘어왔다가, 이게 1분에 승부를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웃음) 그래서 힘들었다. 취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니까. 촬영은 저녁부터 다음날 점심까지 계속 되는데, 술은 중간에 깨잖나. 그러니까 또 마시고. 그러면서 사람이 피폐해지는 거다. (웃음)

-술 취해서 곤란한 상황은 없었나.

=혀가 꼬여서 나온 대사들은 그대로 들어갔다. 사람이 긴장하면서 취해 있으니까 미묘한 감정이 나오더라. 술은 취했는데 장문의 대사는 해야 돼. 그럼 이상한 꼴이 된다고. (웃음)

-컷이 많은 편이었다고.

=많은 편이었다. 처음엔 ‘왜 이렇게 많을까’ 생각도 했었는데, (웃음) 촬영 중반쯤 현장편집본을 봤다. 그때부터 템포감이 생기더라. 젊은이들 감성에 맞춰주려고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고 경쾌하고 밝은 느낌이 되기 위해선 카메라를 픽스하는 것도 좋지만 컷 구성을 달리해 안 보였던 것들을 찾아서 보여주면 어떨까, 감독님이 그런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완성된 걸 보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질투는 나의 힘> <국화꽃 향기> <살인의 추억> 등은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가는 영화들이었고 감독님들 스타일도 컷을 많이 안 가는 편이었는데, 이번 영화는 그거에 반한 거다.

-어떤 설문조사를 보니까 브랜드 선호도를 높인 광고모델 4위로 뽑혔더라. 함께 휴가가고 싶은 연예인 2위에 오른 적도 있다. 1위는 강동원이었다. 배우로서 박해일의 포지셔닝은 대중성에 별로 가깝지 않은 것 같은데.

=맞다. 나는 대중과 널리 두루두루 같이 놀기가 힘든 사람인 것 같다. 맞춰주면서 하기에는…, 맞춰주면서 하기야 하지. 근데 좀더 깊이가 있고 의미가 있고 기억에도 남으려면….

-박해일이란 배우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아는지.

=일단 착하게 생겼다, 청년 같다, 변태 같다. 보통 영화의 모습에서 보여지는 대로 느끼는 것들이 있는데 이번 작품이 개봉하고 나면 어떻게 보여질까 예상은 미리 한다. 근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재밌어야 한다는 거 아닌가. 이렇게 라이브한 영화를 하려면 내가 재미를 갖고 들어가야 하는 게 컸던 것 같다.

-눈은 부모님 중 누구의 모습을 닮은 건가.

=아버지가 사회생활 초년생이셨을 때 쌍꺼풀이 없었는데, 그 선한 이미지에서 본인이 손해본다는 걸 느끼셨나보더라. 그래서 쌍꺼풀 만들어주는 반달 모양 테이프를 붙이셨었다. 근데 쌍꺼풀이 됐더라. 30대부터 그게 윤곽이 잡혀서 그 이후에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 인상이 바뀌어 있더라. 이해가 가더라. 착해서 손해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런 게 인지가 되니까. 근데 나는 내 자신이 그렇게 착한 놈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인이 특이하다. 따로 흘려쓰는 모양을 만들지 않고,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쓰는데, 아직도 그렇게 하는지.

=그걸로 한다.

-따로 만들 생각은 없나.

=만들었잖나. 굳이 다르게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

-1년에 한번씩 연극무대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해 상연된 <청춘예찬>에 출연하기로 알려졌다가 결과적으로 다른 배우가 했다. 스케줄상의 문제였나.

=스케줄 때문은 아니었다. 스케줄엔 문제가 없었지만 타이밍의 개념에서 안 맞았다. 공연 홍보는 이미 돼 있었고 연출자와 늦게 얘기를 했다. <청춘예찬>은 나한테 의미를 갖고 있는, 지금의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걸 다시 하기엔 너무 소중하고, 그때의 치열함, 그 작품에 맞는 나의 모습을 다시 뽑아내기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박근형 선생님께도 솔직하게 말했다. 오히려 새로운 작품이면 하고 싶은데,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좋은 소리, 안 좋은 소리 둘 다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 하기를 잘했다는…. 나는 그때 그 모습이 아니니까.

-그때 그 모습이라 함은 어떤 건지.

=그 역할 속의 모습. 내가 그때 생각했던 그 역할의 감정과 모습, 그 작품의 내용에 맞는 캐릭터의 모습에서 지금의 나는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은 그때 준비하는 데만 1년여 가까이 걸렸었다.

-자신이 변했다는 생각이 드나.

=가끔. 근데 그건 제3자들이 더 잘 알지 않나? 현장 스탭들이 더 잘 아는 것 같다. 이번 영화 스탭 중에 크레인 기사님이, 알고 보니 나랑 다섯 작품째 같이 하고 계시더라. 영화 찍으면서 기사님이, 해일 씨, 근데 이상하네, 지금 그건 뭐야? 그러셨다. 아, 그래요? 그건 어쩔 수 없다. 캐릭터를 하다보니까 달라지는 거고, 끝났다 하더라도 깨끗이 달라질 수는 없다. 평생 가도 1% 정도는 남을 것 같다. 사람은 축적돼가는 거잖나. 진국도 있다가, 유림도 있다가, 변태도 있다가. (웃음) 좀 일관되지 않아서 사람들한테 오해도 받고 그런다. 너 내가 싫은 거냐? (웃음) 어느 순간 나를 잊어버릴 때도 있다. 어, 이건 난데 왜 나같이 안 보이지?

-<질투는 나의 힘> 인터뷰 때, 자신은 왠지 연극무대에서 더 오래 남을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가 오래도록 필요로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다. 기억한다. 지금도 항상 두렵다. 위태위태하고. 모든 배우들이 다 그럴 것 같은데. 재미있게 하려고 하고, 능동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작품이 끝나고 본인이 혼자 넋놓고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될 때, 내가 잘하고 있나, 내가 얼마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땐 정말 시작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계속 안정적으로 갈 수 있을까, 내 안에 작은 그릇이라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년, 천국에 가다>와 <괴물>에서의 역할을 설명해달라.

=초등학생 녀석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결핍감을 갖고 있다가 주변의 또 다른 미혼모를 알게 돼가는 과정이다. 전체적인 모티브는 톰 행크스 나오는 <빅>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괴물>에서의 역할은 대졸 백수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괜히 불만 많은.

-아침에 인터뷰가 잡혀서 일찍 나오느라 힘들었겠다.

=별로. 서른이 되니까 사람이 부지런해져서…. (웃음)

-서른이 되려면 1년이 더 남았는데. 부지런해졌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가.

=좀더 진지해지고, 밀도있고, 넓게 보고, 넓게 사고하고, 과감해질 땐 과감해지고.

-지금보다 진지해지면 너무 무거워서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보여지는 것보다 안으로 다져지는 게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뜻이다. 하루하루가 금방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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