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4월17일(일) 밤 11시45분
젊은 여인이 강물에서 머리를 감고 있다. 그것도 상체가 훤히 다 드러나는 나신의 미디엄숏으로. 지금 봐도 상당히 충격적인 타이틀백으로 시작하는 영화 <감자>는 1960년대 청년정신의 이데올로그였던 소설가 김승옥의 연출작이다. 지난해 이맘때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을 출간, 제2의 작품활동을 시작하며 주목을 받았고, 올해는 EBS를 통해 방송되고 있는 <지금도 마로니에는>에서 김지하, 김중태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승옥. 그가 60년대 말 영화연출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채롭다. 최근엔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 출신으로 늦깎이 감독 데뷔를 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김승옥의 영화감독 데뷔는 당시 60년대 청년문화를 이끌었던 선두주자들의 고민의 일단을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영화는 충격적인 타이틀백 다음으로 “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 불세출의 천재 김동인이 1920년대 평양 칠성문 밖으로 나섰다 만난 이지러진 그 시대의 희생자들을 소설 <감자>에 담았던 것이다. 이제 그가 간 지 20년을 맞아 그 불후의 명작을 영화화한다”라는 장엄한 해설과 함께 시작한다. 소설가인 김승옥이 왜 자신의 소설이나 원작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지 않고 선배소설가 작품인 <감자>를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생각하면 의아하기도 하다. 그러나 앞의 내레이션을 보면 대강 짐작이 간다. 식민지 시대 희생자들의 모습을 통해 60년대 말 한국의 상황을 은유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반전과 누벨바그, 68혁명 등 청년문화의 발호가 전세계적인 추세였던 1960년대 말 한국의 젊은이들은 시대를 우회하는 방식의 다소 현실도피적인 방법밖엔 달리 길이 없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다분히 결과론적인 유추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도 저항적 청년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