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예술영화전용관 필름포럼 개막작 <오월의 구름>
2005-04-19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삶 무심하게 흘러간다 오월의 구름처럼
<오월의 구름>

터키의 젊은 감독 누리 빌게 세일란은 두번째 장편영화 <오월의 구름> 끝부분에 ‘안톤 체호프에게 바친다’고 적고 있다. 농촌의 일상을 여유롭게 그리면서도 낭만주의나 허세에 빠지지 않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그리면서도 따뜻한 유머감각을 잃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은 체호프에게서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는다. 신인감독이 고향에서 영화를 찍기 위해 온 가족을 총동원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첫장편을 찍을 때의 경험을 되살린 자전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찍는 과정을 영화화하면서 카메라 안과 밖의 삶을 교차시키는 구성에서 이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간단하게 요약해 <오월의 구름>은 영화 한편을 만들기 위해 모인 네 인물의 서로 다른 욕망을 그린다. 돈없이 영화를 찍기 위해 고향에 내려온 신인감독 무자파는 아버지, 어머니, 조카 등을 등장시켜 저예산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할 수 없이 카메라 앞에 앉은 아버지의 머릿 속은 온통 산림정비사업을 하는 정부로부터 손바닥만한 자신의 땅을 지키는 것뿐이다. 번번이 대학시험에 떨어져 공장을 전전해온 조카 사펫은 감독인 형에게 잘 보여 지루한 시골을 떠나 이스탄불에 쫓아갈 심산이다. 9살 꼬마 알리는 갖고 싶었던 음악시계를 손에 넣는 것 말고는 영화야 어떻게 되는 관심없다. 연기도 기술도 젬병인 왕초보 스텝들과 일하면서 무자파의 속은 부글부글 끓는다.

사실 오월의 구름처럼 따사롭고 느긋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를 두고 ‘욕망’이니 ‘좌절’이니 하는 강한 어감의 단어를 쓰는 건 좀 어색하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연상시키는 나즈막한 시골 언덕과 시계가 필요없는 시골의 단조로운 일상을 영화는 천천히 훑으면서 작은 에피소드들을 무심한 듯 툭툭 던진다. 그러나 이 세계에도 세속적 잣대로만 측량할 수 없는 저마다의 욕망과 배신과 좌절이 있다. 이 인생 드라마의 중심에는 예술적 야심이라는 명분 아래 식구들을 이용해먹는 영화감독이 있다. 이미지나 분위기에서는 키아로스타미의 서정성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오월의 구름>에서 흩어지는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영화적 힘은 희노애락의 굴곡으로 점철된 인생사에 대한 알레고리다. 밤샘 촬영을 고비로 네 남자는 작은 변화들을 겪는다. 그 변화들에 영화작업이 어떤 구체적 관계가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사펫은 영화만 찍고 내빼려 하는 사촌형 감독 때문에 상처입고, 알리는 며칠 전 고모를 속였던 일로 인해 도리어 횡재를 맛본다. 그리고 시골의 일상은 다시 무심하게 흘러간다.

영화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연기한 인물은 감독의 실제 부모다. 감독의 친구인 무자파 역의 무자파 오즈데밀과 사펫 역의 메흐메드 에민 토프락은 이 감독의 세번째 영화 <우작>의 두 주인공으로 출연해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공동수상했다. 22일 개관하는 예술영화전용관 필름포럼의 개막작으로 2000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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