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경고: 이 글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미스틱 리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장르를 통해 예술에 도달하는 전범’이라 할 만큼 형식미가 뛰어나다. 또한 이 영화의 감동이 <주먹이 운다>류의 ‘신파’를 넘어, 하나의 신념을 보여주기에 더욱 값지다. 그런데 이 영화의 메시지는 언뜻 의아한 면이 있다. 마초이즘의 극치인 마카로니 웨스턴의 살아 있는 전설이요, 평생 공화당 지지자였던 이스트우드를 떠올려본다면, 이 영화는 세 가지 지점에서 ‘이상’하다.
첫째, 여성 복서라는 점. 둘째, 혈연가족을 배제하고, 인종도 뛰어넘는 개인들간의 연대를 강조한다는 점. 셋째, 안락사를 행한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들은 ‘부시 정권’이 표방하는 백인 남성 중심적이고, 가족의 가치와 생명권을 중시하는 보수우파 이데올로기와 괴리되어 보인다. <미스틱 리버> 역시 9·11 이후 미국인의 분열된 자의식과 반전의 메시지를 풍기는데, 그렇다면 이스트우드의 정치적 성향이 바뀐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일관된 (주류 보수파나 종교 우파와는 구분되는)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ist)로 볼 수 있다. 이 글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미스틱 리버>가 지닌, 주류 보수주의와 차별되는 문제의식을 짚어보고, ‘자유의지론’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주류 보수주의와 차별되는 세 가지 지점
첫째, 전통적으로 스포츠영화, 특히 격투기영화는 남성의 몸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남성들간의 우애로 드라마를 엮는 장르이다. 사각의 링은 사내들의 땀과 피가 뿌려지는 제단이다. <록키> <알리> <챔피언> <남자 태어나다> <역도산> <주먹이 운다>에서 여성은 한결같이 ‘엄마/애인/엄마 같은 애인’으로 주변화 된다(유일한 예외가 <반칙왕>이다). 여자, 그것도 서른 넘은 여자가, 밥값을 줄여가며 돈을 모아 그에게 지도를 청한다. 처음엔 ‘여자는 안 받는다’고 거절하다 그녀의 투지에 할 수 없이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권투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그녀는 낭만적 사랑, 결혼, 안락한 가정을 꿈꾸지 않는다(<프리다>나 <실비아>보다 훨씬 독립적이다). 1982년 ‘남녀동등권 헌법 수정안’(ERA)의 인준을 반대하고, 올해 32년간 유지되던 ‘낙태 합헌’을 뒤집고자 재심을 요청한 낙태반대론자들로 대변되는 주류 보수주의는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이상을 추구한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에서 여성의 욕망(주로 복수심)은 남성과 동일하게 인정된다. 그는 <더티 하리4: 써든 임팩트>에서 윤간당한 여성이 가해남성들을 죽이는 것과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난자당한 창녀가 총잡이를 고용해 보복하는 것을 인정했다. 피해여성이 증오와 분노를 느끼고 복수심을 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여성도 자아실현을 원한다는 것을 그는 자연스럽게 인정한다.
둘째, 혈연가족을 배격하고 개인들간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할리우드영화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혈연가족의 신성함을 믿는 할리우드영화는 부지기수이며, <갓센드> <포가튼> <인크레더블>에서 보듯,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피가 아니라 꿈으로 맺은 대안가족을 그린다. 그녀는 혈연가족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며, 그는 친딸에게 거부되지만, 그녀와 그, 그리고 흑인 모건(<더티 하리> 시리즈,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도 흑인 동료와 함께 나온다)은 인종과 성별 구색도 무시하고 하나의 가정을 형성한다. 감독은 아예 이 관계를 ‘모쿠슈라’(혈육)라 선언한다. 부시의 재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력은 ‘가족의 가치’를 지키자는 종교 우파였다. 이에 반해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선 혈연가족이 번번이 회의의 대상이 된다. <퍼펙트 월드>에서 납치범은 때리는 친아비보다 차라리 소년원이 낫겠다는 이스트우드의 판단하에 중형을 선고받았고, 소년은 자발적으로 어머니를 떠나 납치범을 따라 나선다. 둘은 유사 부자관계를 형성하는데,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소년의 어머니는(<캐리>의 엄마만큼 기괴하지 않은데도) 소년의 자유를 제한하기에 납치범보다 덜 정겹게 그려지고, 자식을 때리는 아비는 납치범보다 나쁘게 그려진다. 마침내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선서를 받아내고 납치범은 죽는데, 그는 부모나 종교에 의해 침해받지 않을 소년의 자유권을 주창한 것이다.
셋째, 안락사 문제는 세계적인 쟁점이지만,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적은 거의 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뜨거운 감자’를 후려친다. 그녀는 전신이 마비되고 한 다리를 절단하자, 그에게 안락사를 부탁한다. 그는 고민 끝에 병원에 몰래 들어가 직접 인공호흡기를 떼고 약물을 주입한다. 미국에서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한 주는 오리건주밖에 없지만, 1990년 이후 환자들의 요청에 의해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법이 시행 중이다. 그녀는 인공호흡장치 제거를 의료진에게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자의적인 안락사를 감행한다. 부시 정권이 종교 우파의 지지를 얻고자 어느 정도 합의된 ‘소극적 안락사’를 재심의하라며, ‘테리 시아보’ 문제를 이슈화시키는 이때에, 그는 아예 불법적인 안락사를 직접 자행한다. 그의 행동의 근거는 그녀가 원한다는 것과 인간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자신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으며, 교회/병원/국가 등이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내가 직접 해야지”라는 주제는 <더티 하리> 시리즈나 <용서받지 못한 자> <미스틱 리버> 등에서도 꾸준히 반복된다.
<미스틱 리버>가 전하는 ‘포스트 9·11’ 자의식과 반전의 메시지
<미스틱 리버>는 9·11 이후 미국의 참담한 무의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옛 친구를 딸의 살인범으로 오인하여 죽이고 괴로워하는 그에게 아내는 말한다. “어젯밤 아이들에게 말해주었지, 아빠가 가족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든 잘못된 건 없다고, 결코 비난해선 안 된다고….” 그리고 남편의 의심스러운 점을 누설했다가 죽게끔 한 처에게 “무슨 여자가 남편을 그리 몰라? 남편을 배신한 여자야…”라 비난하며, 자기 남편에겐 “당신은 왕이고 왕은 단호하게 행동하는 거야. 힘들더라도 가족을 위해 뭐든 하는 거야…”라며 완벽하게 합리화시킨다. 그들은 바로 섹스에 돌입하고, 그가 옛 친구를 죽인 것을 아는 경찰친구 역시 사건을 무마하고 6개월간 별거 중이던 자기 아내와 황급히 화해한다. 마지막 퍼레이드 장면에서 경찰 부부가 화목하게 아이를 안고 있고, 살인자 ‘패밀리’는 잘 차려입고 환하게 웃는 가운데, 죽은 이의 아내만이 벌벌 떨며 이곳저곳을 헤맨다.
지독히도 운이 없던 소년이 자라서 친구에게 억울하게 살해되지만, 그의 불행한 삶과 억울한 죽음을 모두 알고 있는 그들은 입을 다문다. 살인자의 아내는 살인을 ‘부정’(父情)으로 정당화하고, 경찰친구 역시 불행한 정황을 봉인해버린다. 그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자기 가족의 결속을 굳건히 한다. 진실이나 정의는 중요하지 않고, 이기주의와 가족주의가 정의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자신의 업보와 관련있는 딸의 죽음에 오열하며 무고한 친구를 죽인 그가 아내로부터 비난받지 않고 가족주의로 지지되듯이,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에서 기인한 9·11 테러에 분노하며 무고한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 정부 역시 미국 언론으로부터 비난받지 않고 국가주의로 옹호된다. 부당한 살인이었음을 알고 있는 경찰친구조차 진실이 파헤쳐지는 것을 꺼리며, 그럴 때일수록 불행으로부터 자기 주변 챙기기에 바빠지듯이, 부당한 전쟁임을 알고 있는 국제사회의 어느 나라 어느 기구도 전쟁의 부당성을 따지지 않으며, 이런 때일수록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조심하며 내부 결속을 다진다.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처럼, <미스틱 리버>는 강자 혹은 적어도 방관자인 미국 시민의 자괴감과 부채감 같은 분열적인 내면을 보여준다. 9·11 이후 미국의 전쟁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자조하는 것이다.
가족보다 개인의 연대를 중시하는 자유의지론
일찍이 서부개척시대의 농민정신에서 유래하여 중소상인 등 서민층에서 많이 발견되는 자유의지론은 수적으로는 주류 보수주의와 맞먹지만, 정치세력화가 덜 된 집단이다. 토종 카우보이 정신이랄 수 있는 ‘스스로 돕는 노력’을 강조하는 이들은 신, 자연법, 도덕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중시한다. 따라서 낙태나 동성애, 안락사, 마약 등에 대해서도 ‘사생활의 권리’로 모두 인정하는데, 이 점에서 주류 보수주의와 종교 우파와 확연히 구분된다. 시장원리를 우선시하며, 빈부는 개인의 책임으로, 규제나 복지정책을 인정하지 않기에, 좌파나 진보주의와 구분된다. 반세금-반복지-반정부를 표방하며, 파병과 전쟁에 반대하고 패권주의적인 대외정책에 반대한다. 가족주의, 민족주의, 집단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개인주의자들로 개인의 ‘총기소지권’을 중시하며, 60년대 흑인의 ‘공민권’ 운동의 성과도 인정하고, 여성의 권리 신장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앞에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여성과 흑인에 대한 시선, 그리고 가족보다 개인의 연대를 중시하는 시각과 안락사에 있어서 종교보다는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는 이스트우드의 사고는 ‘자유의지론’의 발현으로 해석된다. 또한 <미스틱 리버>에서, 자위권을 발동하여 직접 갚아주는 아비의 심정을 인정하면서도, 미국의 패권주의와 전쟁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를 암시하는 것 역시 ‘자유의지론’이 표방하는 국내문제 우선주의로 해석된다. 이스트우드는 영원한 ‘카우보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