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로 갈 몬테 사미엔토, 몬로비아로 갈 알내슬 스타. 화물선들이다. 반대편에는 대형 LNG선 두척이 위용을 자랑한다. 그들 사이에는 이순신 장군이 첫 승전고를 울렸던 옥포 앞바다가 수평선을 내보이며 드넓게 펼쳐진다. “달리세요”라는 유상욱 감독의 신호가 떨어지면, 해안도로 위에서 옅은 갈색 작업복을 입은 화연(김유미)이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바닷바람을 가른다. 화연이 자전거에 몸을 맡기고 달리는 동안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 사이로 크레인을 타고 소니F900 카메라를 쥔 구재모 촬영감독이 허공에 떠오른다.
이곳은 영화 <종려나무숲>의 촬영현장인 경남 거제시 아주동 1번지 대우조선소. 여주인공 화연은 조선소가 자체 개발했고, 바퀴가 64개나 달린 500t급 화물운송차량을 운전하는 트랜스포터로 일한다. 3월부터 촬영은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현장을 지나는 노동자들은 구경을 위해 발걸음을 멈추기 일쑤. HD영화 <종려나무숲>은 <욕망>의 HD기술감독, 현장편집을 맡았던 구재모 촬영감독, <시실리 2km>에서 HD장편을 경험한 김유신 조명감독이 호흡을 맞춘다. 스탭들은 전부 DSME(대우조선해양)의 노란 안전모를 쓰고, 도로 한편의 자재를 나르는 트레일러가 촬영 중간 철판을 떨어뜨리는 굉음이 울릴 때마다 가슴을 졸인다. 비내리는 오늘도 130만평에 달하는 조선소의 구석구석을 돌며 촬영은 계속된다.
바닷가를 달리던 자전거는 어느새 기술연구소 옆 벚꽃길로 장소를 옮겼다. 30여초 동안 경사진 산책로를 단숨에 내려오는 장면에서 빗길이라 약간은 위험해 보인다. “호러영화만 두편 찍어서 그런지 별로 겁이 없다”고 자평하는 김유미는 카메라 바로 앞에서야 브레이크를 밟는 담력을 과시했다. <종려나무숲>에서 그녀는 1인2역을 맡았다. 조선소 근로자로 국제변호사 인서(김민종)와 사랑에 빠지는 화연, 그녀의 어머니이자 과거 이야기의 주역인 정애가 그녀의 이번 임무. “10대부터 40대까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이미지의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상대역 김민종의 귀띔. 화연과 인서가 처음 만날 때 화연이 족구하는 대목이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점도 캐릭터에 대한 힌트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이후 6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유상욱 감독은 미스터리, 스릴러에 능했던 전작들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숨겨진 사연을 기대하라”고 말했다. 김유미, 김민종 외에 이경영, 조은숙도 출연할 예정. 전체 분량의 대부분을 거제도에서 소화하는 <종려나무숲>은 현재 65% 정도 촬영을 진행했고 4월 말 크랭크업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