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교수연찬회 여흥시간에 노교수들 젊었을 적의 사진을 스크린에 보여주면서 알아맞히는 게임을 했다. 비밀리에 부탁해 미리 입수한 사진들이다. 누가 봐도 ‘청춘은 아름다워’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작 사진의 주인공은 시침을 떼고 있다. 틀린 답이 몇 개 이어진 뒤 이윽고 정답이 나왔다. 탄성은 신음에 가깝다. 수줍은 듯 주인공 ‘마리안느’가 무대 위로 올라간다. “여학교 다닐 때 저도 괜찮았거든요.”
나는 기억한다
백숙을 발로 걷어찬 손주에게 화를 내기는 커녕
아이를 기쁘게해주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던 그 눈빛을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한 누구나 할머니가 된다.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의 마지막 가사는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다. 그의 콘서트에 몰려든 중년여인들의 ‘절규’를 나는 ‘청춘의 초혼제’라 부른 적이 있다. 그 많던 소녀들은 누가 데려갔을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두 종류다. 하나는 ‘짱한’ 영화고 다른 하나는 ‘찡한’ 영화다. 앞의 것은 사람을 흥분시키고 뒤의 것은 사람을 안정시킨다. 스크린 속 연인도 마찬가지다. 침실의 연인은 몸을 감미롭게 하고 마루 위의 연인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영화 속 할머니에선 두 가지 냄새가 난다. 프라이드치킨과 프라이드 그린토마토. 배우의 이름은 김을분과 제시카 텐디다. ‘꼬장꼬장’한 제시카 텐디는 80살에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지만, ‘꼬질꼬질’한 김을분은 77살에 <집으로>로 39회 대종상 여우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수업 시간에 이정향 감독의 <미술관 옆 동물원>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마침 그 감독의 후속작품이 개봉 대기 중이었다.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개구쟁이 일곱살 엄청 연상녀와 귀(?)막힌 동거를 시작한다.’ 적어도 인내심을 요하는 극기훈련용은 아닌 듯했다. 수업 듣는 제자들을 몰고 2002년 식목일 개봉 첫날에 극장으로 갔다. 처음에 잔잔하게 웃어대던 학생들이 차츰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영화 내내 여자 주인공은 말이 없다. 말은 없고 글도 모르지만 대신 사랑이 있고 무엇보다 희생의 가치를 안다. 개구쟁이는 프라이드치킨을 그렸는데 연상녀는 백숙을 준비한다. 그 둘 사이 소통의 부재는 역으로 관객을 깊숙이 찌른다. 나는 기억한다. 백숙을 발로 걷어찬 손주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아이를 기쁘게 해주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던 그 선한 눈빛을.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헤르만 헤세의 시에 곡을 붙였다는 서유석의‘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노래다. 사람들은 좋아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따금 누군가 내게 묻는다. 개를 좋아하느냐? 그는 내게 개를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중이다. 개를 좋아하면 개를 먹고 개를 사랑하면 개를 키운다. 꽃을 좋아하면 꽃을 꺾고 꽃을 사랑하면 꽃을 기르는 것과 같다. 어찌 개와 꽃뿐이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먹고 꺾는 장면들이 영화 안팎에서는 늘 진행 중이다.
일곱 살 상우를 연기했던 유승호는 마침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에서 자폐아를 연기 중이다. 우리 모두 사랑 앞에선 장애인이다. 그를 보니 할머니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할머니는 오늘 아침에도 안녕하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