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집 한채를 놓고 벌어지는 참담한 줄다리기, <모래와 안개의 집>
2005-04-26
글 : 김혜리
‘아메리카의 비극’으로 귀결된 부동산 분쟁.

정의와 불의가 싸울 때 저울질은 간단하다. 정의가 이기면 안도하고 불의가 이기면 리얼리티의 쓴잔을 들면 된다. 그러나 만약 정의와 정의가 충돌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물며 불의와 불의가 투쟁한다면? 어쩌면 당신은 천칭을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모래와 안개의 집>에서 캘리포니아 바닷가의 집 한채를 놓고 벌어지는 참담한 줄다리기는 관전하기 녹록지 않은 싸움이다. 역시 어느 한쪽을 편들기 힘든 <주먹이 운다>의 두 복서는 장렬히 싸워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족했지만, 여기서는 누군가 얻으려면 누군가 잃어야만 한다.

분쟁의 한쪽은 1970년대 말 이란의 이슬람 혁명에 쫓겨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망명한 전직 군인 마수드 아미르 베라니(벤 킹슬리)다. 우리는 베라니 대령을 <대부>의 돈 콜레오네처럼 딸의 화려한 결혼식에서 처음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돈 콜레오네와 달리 절박한 가장이다. 인도인, 유대인, 영국인을 오가며 국적을 지워내는 연기로 정평난 벤 킹슬리는 <모래와 안개의 집>에서 등뼈를 곧추세운 오연한 남성을 완벽하게 연기한다. 이 결점 많은 남자가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을 때 관객이 명치를 걷어차인 듯한 통증을 느끼는 것은 온전히 킹슬리의 공이다. 가족의 우아한 삶의 외양을 지켜주기 위해, 베라니는 낮에는 도로 공사현장에서 밤에는 편의점에서 남몰래 일한다. 그리고 영락한 부자들이 흔히 그렇듯 풍요의 마지막 유물로 남은 고급 양복과 자동차로 모습을 바꾸고 귀가한다. 과중한 집세로 파산 직전에 몰린 베라니는 신문에 난 경매물건 공고에서 생활고와 아들의 학자금을 해결할 비상구를 발견한다. 베라니가 점찍은 바닷가 집은 8개월 전 남편에게 버림받고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 중인 파출부 캐시 니콜로(제니퍼 코넬리)의 재산이었다. 잘못 부과된 영업세 고지서를 뜯어보지도 않고 체납한 탓에 캐시는 졸지에 퇴거당하고 집은 경매에 넘어갔다. 거리로 내몰린 그녀를 돕는 것은 퇴거를 집행한 보안관 버든(론 엘다드). 무감동한 결혼 생활에 질린 그는 캐시에게 매료되고 지친 캐시는 버든을 내치지 않는다. 그녀는 선량하지만 약하고 아름다워서 불행을 남에게 전가하는 유형의 여자다.

갈등은 캐시의 변호사와 베라니 대령이 나누는 대화로 요약된다. “베라니씨, 군 정부가 당신이 매입한 가격으로 집을 되살 겁니다.” “시장은 이미 그 네배를 나에게 지불할 수 있소.” “법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당신이 차익을 노리는 바람에 진짜 집주인은 홈리스로 지내고 있어요.” “사물은 보이는 것과 다른 법이오. 이건 나와 내 가족의 절실한 필요요.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소.” 베라니와 캐시가 집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100%의 정의다. 동시에 그들은 둘 다 의롭지 않다. 캐시는 무책임하고 베라니는 불로소득을 탐한다. 캐시와 백인들은 베라니 가족의 이름을 매번 틀리게 발음하고 이방의 불한당 취급한다. 한편 베라니는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억압적 가부장이다. 그들에겐 각자 몫의 오만과 편견이 할당된다.

<모래와 안개의 집>은 관객의 연민과 비판을 이등분하기 위해 거의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부동산(house)을 넘어 이상적 가정(home)을 표상하는 해변의 집을 중심으로 베라니와 캐시는 성, 계급, 문화의 모든 면에 걸쳐 데칼코마니상을 그린다. 문제의 집을 발판 삼아 베라니 대령은 무너지려는 전통적 가족을 추스르려 하고, 첫 결혼에 실패한 캐시와 버든은 새로운 가정을 욕망한다. 모든 이질성 가운데 치명상을 내는 것은 문화의 차이다. 절망으로 산산조각난 캐시가 그들의 문전에 몸을 뉘었을 때, 베라니는 갑자기 “집안에 날아든 새는 천사”라는 이란의 전통에 복종한다(순간 영화는 거의 <골딜락스와 곰 세 마리> 동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흑기사’ 역에 도취된 여자의 애인은 이방의 풍습을 오해한다. 요컨대 <모래와 안개의 집>은 매우 계몽적인 포스트 9·11 영화다. 총 없이는 어린애에 불과하고 겁을 먹었기에 위험한 존재로 돌변하는 보안관 버든은 미국인에게 거울을 보라고 촉구한다. 동시에 페렐만 감독은 베라니 가족의 상처를 통해 내부의 타자들에게 미국사회가 일상적으로 안기는 공포의 감각을 생생히 전한다.

모두가 성격과 신념에 의거해 행동한 결과가 파멸로 이어지는 <모래와 안개의 집>은 고대 비극의 향훈을 풍긴다. 삿대로 젓는 배처럼 느리게 정해진 길을 가는 영화 속 비극의 클라이맥스는,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덮고 오열하는 안티고네를 연상시킨다. 스스로 키예프에서 태어나 캐나다에 정착한 ‘유랑민’ 출신인 페렐만 감독은 집을 인간의 조건과 직결된 근본적 문제로 바라본다. 달빛은 무대 조명처럼 배우의 얼굴에 극적인 음영을 드리우고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는 의미심장한 원무를 춘다. 시종 장중하게 흐느끼는 제임스 호너의 음악은 정서적 스포일러에 가깝다. 숲과 바다, 안개와 빛의 풍경을 보여주는 잦은 인서트는 베라니와 캐시의 이야기에 우주의 운행과 동등한 무게를 불어넣으려 애쓴다. 이 모든 것은 현실적 소재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묘한 연극성을 불어넣는다. 그 때문인지 <뉴요커>는 <모래와 안개의 집>을 외국 출신 감독의 미국사회 비판이라는 점에서 <인 더 컷> <21그램>과 한데 묶으면서 “이 영화들은 오직 진공상태의 비극일 뿐 미국적 삶의 표면은 포착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과 풍자이지 타인의 절망이 아니다”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배우 쇼레 아그다슐루

이란의 일급배우, 할리우드에서 홀로 서다

2004년 오스카상에 투표한 아카데미 회원 중 몇명이나 여우조연상 후보 쇼레 아그다슐루(53)의 이름을 옳게 발음할 수 있었을까? <모래와 안개의 집>에서, 조국을 잃고 언어도 박탈당했으나 강인함과 사랑을 잃지 않는 베라니 부인으로 분한 쇼레 아그다슐루는, 오스카 후보 지명을 따낸 최초의 중동계 여배우다. 1952년 이란 테헤란에서 태어난 그녀는 8살 때부터 배우를 꿈꾸었으나, 딸의 장래 희망을 듣자마자 “우리 가문 이름이 그 판에 엮이는 건 싫다”며 혼절한 어머니 때문에 성을 바꾸기도 했다.

아그다슐루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모스크바영화제 비평가상 수상작 <리포트>(1977)로 은막에 데뷔했고 역시 이란 뉴웨이브의 기수였던 알리 하타미 감독의 <수테델란>을 통해 이란의 일급배우 대열에 올랐다. 그러나 1978년에 일어난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에 즈음해 그녀는 당시의 남편과 경력을 등진 채 영국으로 날아가 대학에서 정치학과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저널리스트가 되려는 문턱에서 아그다슐루는 <레인보우>라는 연극을 제의받았다. 그리고 기자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는 연기를 선택했다. <레인보우>의 미국 순회공연 중 재회한 옛 극단동료인 극작가 하우샹 투지와 결혼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배우로서 제2의 시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이국 억양을 지닌 중년의 중동 출신 여배우가 누릴 수 있는 기회는 한줌도 되지 않았다. 대신 연극무대에 열정을 쏟으며 <20달러> <서바이빙 패러다이스> 등 영화에서 간간이 연기한 아그다슐루는 <아름다운 아메리카> <마리암> 등 미국 내 이란 이민의 고된 삶에 관한 영화를 통해 <모래와 안개의 집>을 준비하던 바딤 페렐만 감독의 시선을 낚아챘다. <모래와 안개의 집>에서 그녀는 말보다 눈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연기로 히로인 제니퍼 코넬리의 스포트라이트를 훔친다. 커다랗고 예민한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무방비하게 노출된 영혼의 알맹이처럼 보여 관객을 연연하게 만든다. <뉴욕타임스>는 아그다슐루의 연기를 “가장 말수 적은 배우가 가장 깊은 페이소스를 전했다”고 평했고 인디펜던트 스피릿상 여우조연상,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비평가협회상이 그녀 품에 안겼다. 이후 TV시리즈 <24>에도 출연한 아그다슐루의 차기작은, <시월애>의 미국판 리메이크 <일 마레>. 샌드라 불럭, 키아누 리브스와 함께 출연하는 이 영화에서 맡은 의사 역에 대해 아그다슐루는 “최초의 비전형적인 역할”이라며 흡족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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