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비전스 오브 유럽> Visions of Europe
2005-04-29
글 : 김현정 (객원기자)
25명 감독들은 거대한 변화의 면전에 던져진 유럽의 미래를 읽는다.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 아키 카우리스마키, 파티 아킨 외/덴마크, 독일/2004년/139분

수백년 동안 지켜왔던 국경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지도만 고쳐 그린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환율을 익혀야 하고, 낯선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뒤섞여야 하고, 평생 모르고 살아도 좋았을 지식을 배워야 한다. 유럽연합(EU)에 속해 있는 25개 국가의 감독들은 그처럼 난감한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방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형식과 소재의 제한은 없다. 850유로의 제작비, (국내에서 그 이상의 제작비를 투자 받는 것은 가능했다) 상영시간은 5분, TV에서 방영할 수 있도록 화면비율은 16:9. 세가지 전제만을 지키면 되었던 스물 다섯 명의 감독들은 저마다 다른 스타일로 다른 비전을 펼쳐보이고, 그 안에서 유럽의 미래를 가늠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거대한 변화의 면전에 던져진 감독들의 태도만은 충분히 흥미롭다.

기나긴 감독 리스트 중에서 가장 명성 높은 피터 그리너웨이는 <European Showerbath> 라는 제목으로 작은 욕조에 모여 샤워하는 나체의 유럽인들을 전시한다. 뚱뚱하거나 날씬하거나 젊거나 늙은 이들은 유럽 각국의 국기를 몸에 그리고 있는데, 모든 국기가 욕조 안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물줄기가 그치고 만다. 스웨덴 감독 얀 트로렐이 연출한 첫번째 단편 <The Yellow Tag> 역시 EU의 그늘을 응시한다. 소와 양은 유럽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가축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중앙조직이 사물을 통제하면서부터 이 가축들은 노란 택을 붙여야만 했고, 택이 없다는 이유로 건강한 소 여덟 마리가 국경지역에서 사살되는 일까지 일어난다. 문화와 경제의 교류 혹은 충돌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통점. 몇몇은 유럽에서도 변방으로 밀쳐진 동구와 러시아, 유럽 부근 북아프리카 이민의 현실을 폭로하기도 하고,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유럽을 옛 친구처럼 추억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저항할 수 없는 변화를 기운차게 받아들이는 시선 또한 이들과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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