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더러운 피, 한지에 배다 <혈의 누>
2005-04-29
글·사진 : 전정윤 (한겨레 기자)

닷새간 다섯 명 다섯 가지 죽음
복수를 부른 외딴섬의 수수께끼
물염치 인간군상 그려낸 지옥도

최상품 종이를 생산하는 외딴 섬, 제지소도 포구도 주막도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섬을 휘감고 있는 짙은 안개와 음습한 기운이 불안하다. 마을의 무사평안을 위한 기원제가 있던 날, 조공 종이를 가득 실은 배가 불탄다. 육지의 수사관 이원규(차승원) 일행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섬을 찾지만 화재는 사건의 서막일 뿐. 원규 일행이 섬을 찾은 ‘제1일’, 나무 창에 참혹하게 매달린 한 일꾼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로부터 ‘제5일’까지 하루에 한 사람씩, 닷새 동안 다섯 명의 섬 사람들이 다섯 가지 방법으로 살해된다.

<번지점프를 하다>로 데뷔했던 김대승 감독의 두 번째 영화 <혈의 누>는 역사추리극이다. 사건의 실마리와 다음 희생자, 그리고 용의자를 추리하고 반전을 통해 진범을 확인하는 치밀한 과정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추리극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또 영화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살해 방법은,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육장’에서 사지를 마차에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까지, 역시 한국 영화 사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하드고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의 누>는 ‘누가 연쇄살인을 저질렀는가?’라는 ‘추리’에 치우치지도, ‘어떻게 죽였는가?’라는 ‘묘사’에 파묻히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이런 참극을 불러일으켰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유도하면서 몰염치한 인간군상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염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촘촘하고 치밀하게 엮인 추리와 묘사는 ‘염치’를 이야기하기 위한 긴요한 수단이다.

7년 전, 제지소의 원주인 강객주(천호진) 일가 다섯 명이 다섯 발고자에 의해 천주교도로 몰려 몰살됐다. 마을 사람들은 강객주 일가에게 은혜를 입어왔으면서도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눈 감고 용인했다. 7년 뒤 벌어진 연쇄살인의 희생자는 그때의 발고자들이다. 유일하게 강객주 일가의 은혜를 잊지 않던, ‘염치를 아는’ 한 인물이 용의선상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이 인물의 감춰진 몰염치함이 드러나면서 그는 용의자 혐의를 벗음과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이렇듯 파렴치범들로 가득한 섬은 이제, ‘산 자의 복수’인 연쇄살인과 ‘죽은 자의 복수’인 초자연적 현상들에 의한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다. 그리고 마지막 희생자와 범인이 드러나고 공포와 불안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혈의 누’(피눈물)가 온 섬을 피칠갑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것이 원혼의 눈물인지 제 발 저린 사람들의 환상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염치를 내팽개친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옥이 이 보다 더 참혹할 수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연쇄살인 방법들은 영화의 맥락에서 맡은 바 자기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해낸다. 파렴치함과 이에 대한 분노의 정서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이 섬의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가족사를 간직한 수사관 이원규의 자각을 일깨워주는 장치가 된다. <혈의 누>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미술·의상·촬영·조명 등 화면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완성도이다. <춘향뎐>의 민언옥 미술감독 등이 빚어낸 빼어난 화면이 속도감 넘치는 편집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영화를 빛낸다. 차승원뿐 아니라 강객주 죽음 뒤 제지소를 차지한 집안의 아들로 출연한 박용우는, 감독이 영화의 공 가운데 절반은 떼어 줘야 한다고 말할 만큼 호연을 선보였다. 5월4일 개봉.

“인간본성 찾아 사극으로 번지점프”-<혈의 누> 김대승 감독

“사랑 대신 탐욕과 염치에 대해 이야기할 뿐, <혈의 누>는 <번지점프를 하다>와 같은 영화다.”

김대승(38) 감독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와 <춘향뎐> 등 서정적인 사극의 조감독을 맡았고, 멜로드라마 <번지점프를 하다>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른 지 4년만에 ‘뜻밖에’ 잔혹 역사추리물 <혈의 누>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두 작품 모두 사람의 본성을 진지하게 성찰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은 영화”라고 말했다.

멜로드라마를 기대했던 관객들이 느낄 당혹감을 배려한 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혈의 누>는 숱한 사람들이 피칠갑을 한 채 죽어나가는 영화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탐욕과 몰염치를 비판하며 인간 사회의 염치와 사랑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는 <번지…>와 <혈의 누>가 “현실의 시간을 영화적 시간으로 바꾸는 형식적 실험을 계속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 말대로 두 영화 모두 긴 분량의 회상장면을 적절하게 분산배치해 극의 긴장을 배가한다.

김 감독은 영화 만드는 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혈의 누>의 키워드인 ‘염치’라는 단어로 풀었다. “남의 돈 50여억원을 들여 영화를 만들었고, 관객들은 7천원을 내고 극장을 찾아 2시간을 소비한다. 관객을 고문하는 영화로 제작비를 날리는 것은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염치없는 짓’이다.” 지난 2000년부터 기획에 들어간 <혈의 누>에 2003년 합류한 김 감독은 1년여 동안 각색 작업에 매달린 끝에 촘촘한 그물같은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 전반에 멜로적 감수성을 덧입혔고, 말 추격신 같은 볼거리도 추가했다. 반면, 잔혹한 살인장면은 단순한 볼거리로 전락하지 않고 이야기 안에서 자기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구성에 정성을 쏟았다. 마을주민들의 의상 색깔 하나에도 계급과 성격 등 캐릭터의 특징을 담아내려고 애썼다. 섬과 제지소, 포구 등 주요 공간의 연출에 공들인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김 감독은 “관객들이 가짜라고 느끼지 않을 만큼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좋은 감독은 스태프들을 고생시키지 않는 감독이 아니라, 스태프들의 고생을 보람으로 돌려주는 감독’이라 믿고 혹독하게 작업했다”는 단호한 말로, 또 “스태프들이 어느 정도는 보람을 느끼고 있을 것 같다”는 느긋한 말로, <혈의 누>에 대한 자신감을 넌지시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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