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만 고바디는 쿠르드족의 언어로 영화를 만드는 거의 유일한 감독이다. 그자신이 쿠르드족인 고바디는 첫 번째 장편영화인 <취한 말들의 시간>으로 2000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고, 그 뒤에도 쿠르디스탄에 머물면서 <고향의 노래> <거북이도 난다>를 완성했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한 <거북이도 난다>는 미군이 침공하기 며칠전을 배경으로 이라크의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찍은 영화.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 탄압 정책의 흔적과 태어나는 순간부터 더불어 살아야만 했던 지뢰밭, 눈앞으로 다가온 전쟁을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어린시절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났던 고바디는 자신이 기억하고 겪었던 모든 일을 영화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68년생인 고바디의 체험을 지금의 아이들도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스펙트럼’ 심사위원으로 처음 한국을 찾아온 고바디는 5월2일 기자회견에 참석해 타국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쿠르드족의 현실을 침착하게 들려주었다.
-<취한 말들의 시간> <거북이도 난다>는 모두 아이들을 찍은 영화다. 당신이 쿠르드족의 현실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유독 아이들에게 끌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나도 아이같다고 생각한다. 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처음 이라크에 갔을 때에는 반전에 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아이들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힘들게 전쟁을 겪었고 미래도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미래를 주고 싶었다.
-<거북이도 난다>에 출연하는 아이들은 모두 비전문 배우들이다.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캐스팅했는가. 그리고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배우를 찾기위해 어시스턴트 3명과 4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이라크의 쿠르디스탄 지역을 두달동안 돌아다녔다. 그 때문에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은 모두 다른지역 출신이다. 위성으로 출연한 아이는 연기도 잘하고 똑똑해서 계속 영화를 하게 할 생각이다. <취한 말들의 시간>에 아윱으로 나오는 아이와 함께 내가 만드는 영화에 스탭으로 참여할 것 같다. 아그린은 연기를 하고 싶어해서 쿠르드족을 위한 방송국에 소개시켜주었다. 지금 월급 3백달러를 받고 있는데, 앞으로도 30년은 일거리가 떨어지지 않을 듯하다(웃음). 눈이 안 보이는 아이는 영화촬영이 끝나고 수술을 받아서 시력을 회복했다. 나는 내 영화가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눈을 뜨게 해주는 영화였으면 했고, 사전적인 의미로도 눈을 뜨게 했다.
-당신 또한 쿠르드족이다. 당신이 만드는 영화와 같은 경험을 겪은 적이 있는가.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일어났을 때 나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그 혁명 때문에 쿠르디스탄에서 내전이 있었다. 나는 그 전쟁을 지켜보았고 이어진 이란·이슬람 8년 전쟁도 그 지역에서 겪었다. 크고 작은 전쟁이 매일 일어났다. 전쟁중에 내 사촌 3명과 삼촌이 살해당했고, 고모가 죽었고, 여동생이 다쳤다. 그래서 내가 쿠르드족의 번뇌와 고민을 영화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영화의 캐릭터들은 모두 어느정도 나와 닮았다. <거북이도 난다>의 아이들도 내 마음 속에 있던 외침이다. 나 역시 가장이었다. 열여섯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에 누나 셋과 동생 셋은 장남인 내가 아버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당신이 쿠르드 족의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고, 정치의 천적이나 마찬가지다. 쿠르드족도 그렇다. 이란과 이라크, 터키, 시리아에 나라없이 퍼져 살고있는 쿠르드족은 4천만명이나 되지만, 그들을 위한 영화는 여덟편뿐이고, 그나마 필름이 낡아 제대로 볼 수도 없다. 쿠르드족은 매우 영리하고 존중받아 마땅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데도 그들이 발전하길 원하지 않는 아랍국가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쿠르드족은 정치적이지 않다. 그런데 쿠르드를 둘러싼 아랍국가들이 쿠르드를 정치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비행기, 전쟁, 폭탄이 또한 쿠르드를 정치적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