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남자와 첫경험이 어땠냐는 새신랑의 첫날밤 질문에 정혜는 “그냥 아팠어요”라고 응수할 뿐이다. 기억하기 싫지만 지워지지 않는 그 남자와의 강제적 관계는 그녀에게 말 그대로 아픔만을 주었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어머니가 너무 빨리 한 줌의 재로 돌아가 버리자 정혜는 결국 스스로를 닫아버리고 집을 나와 혼자 살아간다.
칼날 같은 세상과는 거리 두기를 하고 홈쇼핑과 인터넷을 통해 소통할 뿐이지만 정혜는 그때의 시린 상처를 덮어줄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은연중에 기다린다. 버림받은 고양이와 상처받은 남자를 껴안아주는 ‘여성’을 부지불식중에 간직하면서….
무표정한 정혜를 100% 핸드헬드 카메라의 흔들리는 영상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아낸 영화는 감독의 데뷔작이었는데도 여러 영화제서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20페이지짜리 우애령의 단편 <정혜>와 100분 분량의 <여자, 정혜>사이에는 호흡의 차이가 있지만 결말에서 유사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감독이 원작자와 계속 대화를 나눠왔기 때문임을 음성해설을 들으면 알게 된다. 감독과 김지수, 그리고 윤일중 PD가 함께한 이 음성해설은 조금은 모호했던 설정들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부록으로는 오디션 장면과 작가 지망생 역의 황정민, 김지수의 인터뷰가 1장의 디스크에 충분한 분량으로 담겼지만 음성해설에서 언급되는 NG나 삭제 신이 담기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쉽다. 화질은 조금 탁한 편이지만 자잘한 생활 소음의 사운드는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