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겐 낯선 노래다. 한국말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국경을 넘은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했다. 지난 4월22일 밤 일본 도쿄 유락초의 한 극장에서 강산에가 <라구요>를 부르자 눈물을 흘리는 일본인들도 보였다. 23일 도쿄에서 개봉한 영화 <샤우트 오브 아시아>의 전야제 이벤트였다.
<샤우트 오브 아시아>는 북녘 땅에 고향을 두고 평생을 그리워했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라구요>에 담아 노래했던 한국의 록가수 강산에가, 아시아 각국의 가수들을 찾아가 함께 이야기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노래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현진행(겐 마사유키) 감독은 영화의 내레이터로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실었다. 이미 방송계에선 휴먼 다큐물 작가로 유명한 그지만, 극장개봉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말도 서툰 재일동포 2세인 그는 영화에서 <샤우트 오브 아시아>가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보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아시아의 가수들 또한 분쟁이 끊이지 않는 땅에 살아가며 스스로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80년대 초 오키나와 록의 여왕이라 불리며 등장했다가 갑자기 잠적해버렸던 마리. 주일미군과 술집에 나가던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 “너는 불행한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고 한다. 엄마는 마을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는 할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다. 가끔 만나는 엄마를 소녀는 언제나 이름으로만 불렀다. 또 다른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갔던 엄마가 주검으로 오키나와에 돌아와 묻힐 때 비로소 그는 “엄마”를 소리내어 불러보았다고 했다. 차별과 고통의 기억만 있을 뿐인 고향 땅을 그 이후 밟지 않았던 마리는, 영화 속에서 강산에와 함께 오키나와를 방문해 수십년 만에 밴드 동료들과 재회하고 클럽에서 노래를 부른다. 엄마의 무덤 앞에서도 노래를 선물했다. 여행을 통해 그의 마음의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져간다.
필리핀의 싱어송라이터 조이 아얄라는 원래 기자였다. 한 시장에서 일어났던 폭파테러사건 현장에 취재를 위해 달려갔던 그는 이후 펜을 던지고 기타를 들었다. 소수민족 문제 등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 땅에 평화를 노래하기 위해서다.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록그룹 슬랭크의 인기와 공연 현장의 에너지는 아시아의 가수들에게 별 관심없었던 이들에겐 놀랄 정도다. 내놓는 앨범은 언제나 1위. 1991년 정식데뷔 이래 정의와 사회에 대한 저항을 노래한 이 그룹의 공연장엔 언제나 폭동을 대비해 경찰 병력이 깔리곤 한다. 비폭력 저항과 사랑을 노래하는 슬랭크는 영화 속에선 이라크전 반대를 위한 전국투어를 몇달째 벌이는 중이다.
영화에서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는, 베이징에서 활동 중인 조선족 출신 신세대 보컬 그룹 아리랑의 멤버들 한명의 집에서다. 강산에와 함께 그곳을 방문한 키보드 주자 유경천은 고향인 옌볜에 가보지 못한 할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짓고 대신 아리랑 멤버의 할머니를 꼭 껴안아드린다. 분단의 현실 때문에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할머니는 모두 ‘우리’의 할머니이기도 함을, 작품은 잔잔히 보여준다.
이 밖에 윤도현밴드, 필리핀의 그레이스 노노, 일본의 이마와노 기요시 등 아시아 각국의 톱 뮤지션들이 강산에의 노래 여행에 등장한다. 2003년 한국에 속속 도착한 이 아시아의 가수들이, <샤우트 아시아>를 열창하는 공연장면도 담았다.
이 작품은 4년 전 “아시아의 뮤지션들이 함께 노래를 만들어보자”는 기획에서 출발했다. 섭외부터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현 감독은 작품 속에서 어려웠던 순간도 솔직히 담아놓았다. 강산에는 곡을 만들어내야 하는 쫓기는 일정 속에서 카메라를 향해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것이 이 다큐멘터리의 미덕이다. 노래를 통해 아시아의 현재를 찾아가는 이 한·일 공동제작 다큐멘터리는 먼저 도쿄를 시작으로 일본 전국에서 순차 개봉할 예정이다. 현 감독은 “한국에서도 개봉되는 기회가 꼭 오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