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기자, 휴대폰 전화번호 바뀌었으면 날래날래 신고해야 할 것 아니야.” 정답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약간 쉰 듯하면서도 이북 사투리와 연륜이 녹아 있는 그의 목소리는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지난 4월25일 낮 1시30분께, 고우영 선생님의 차남 성언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고 선생님이 낮 12시34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분했다. 오랜 간병으로 마음의 준비를 한 탓이리라.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머릿속이 멍해졌고, 기사를 쓰느라 노트북에 올려놓았던 손가락들이 와들와들 떨렸다. 먼저 데스크에 비보를 전하는데 가슴이 쿵쾅거려 말을 제대로 잇기가 어려웠다.
고 선생님이 마음 독하게 먹고 몸 관리를 하셨다면 최소 몇년은 더 사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걸 원치 않았다.
지난해 5월1일이 생각난다. 나는 고우영, 신문수, 이정문 선생님 세분과 한 호프집에서 올림픽 대표팀의 축구 경기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세분 다 워낙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 술자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좀 걱정이 됐다. 2002년 대장암, 2003년 간암 판정을 받으신 분이 술이라니.
술김에 ‘직언’을 했다. “선생님, 술 드셔도 되나요?” 선생님의 말씀. “마시다가 하늘나라에 가면되지, 무슨 걱정이야.” 그는 평소 인생을 즐긴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 하고, 마시고 싶은 것 마시고, 운명은 하늘에 맡긴다고 했다. 쫀쫀하게 몸을 움츠리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고 선생님은 타고난 팔방미인이었다. 그의 빈소를 찾은 선후배 만화가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다. “이제, 만화계에 재주꾼은 다 사라졌다.” 그의 클래식 기타 솜씨를 그리워하는 동료도 있었다. 만화 외에도 문학, 여행, 낚시, 사냥, 복싱, 스킨스쿠버, 테니스, 야구, 골프 등에서 전문가라 할 정도의 실력을 뽐냈다. 만화 속 대사와 똑같은 어투와 재치, 넓고 따뜻한 그의 마음 씀씀이에 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004년 가을, 폐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그는 여전히 낙천적이었고 유머가 넘쳤다. 올 초 그를 만났을 때, 지난 2년간의 투병 때와 달리 모습이 많이 초췌해 보였다. 풍성하면서 웨이브가 멋들어진 은색 머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래도 그의 얼굴엔 그늘 한 점 없었다. “폐로 전이됐다는 게 오진 같아. 나는 그저 기침 나는 병 정도라고 생각하거든. 그 때문에 주사를 맞고 있으니, 참.”
그분의 업적을 일일이 나열해 무엇하랴. <임꺽정> <수호지> <일지매> <삼국지> <서유기> <초한지> <가루지기전> <십팔사략> 등은 천대받던 만화를 예술 장르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970∼80년대 군사독재의 암울한 터널을 지나던 국민들은 권력의 잔인함을 비꼬면서 인생의 깊은 지혜를 담은 그의 만화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의 인생도 드라마 같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유작으로 그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말 내가 펴낸 <한국대표만화가 18명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불행하게도, 그의 인생을 담은 마지막 책이 되고 말았다.
1938년 만주 번시에서 태어나 귀족처럼 살았고, 해방과 함께 온 가족이 남한으로 내려왔으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고, 청년 가장이 되어 만화가의 길로 뛰어들었고, 무명 작가로 숱한 고생을 하다가 1972년 1월1일 <일간스포츠>에 <임꺽정>을 연재하며 ‘국민만화가’가 된 천재 사나이.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은 아쉽다. 그러나 나는 그를 추억하며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