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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강 같은 평화! 탁월한 반전영화 <거북이도 난다>
2005-05-04
글 :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부시도 후세인도 아닌 오직 평화!’

<거북이도 난다>를 보면서 떠올린 슬로건이다. <거북이도 난다>는 이라크의 쿠르드족에 대한 이야기다. 쿠르드족은 무려 2천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유랑민족. 유럽이라면 나라 몇개는 세우고도 남을 인구다. 그들은 이라크에서 학살당하고, 터키에서 억압당하고, 이란에서 푸대접받는 신세다. 후세인 치하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시아파도 수니파도 아닌 쿠르드족이었다. 지금은 이라크 정규군으로 편입된 쿠르드족 민병대는 아직도 “할랍자의 비극을 잊지말자!”고 외치면서 행군을 한다. 수십년 동안 후세인에 맞서 싸워온 늙은 쿠르드족 군인들이 노구를 이끌고 구호를 외치면서 훈련받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 늙은 군인들의 구호 하나만으로 할랍자의 비극이 쿠르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느낄 수 있었다. 후세인은 생화학무기로 1988년 할랍자의 쿠르드인 5천여명을 몰살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쿠르드인이 후세인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당시 인종 청소로 희생된 쿠르드인은 18만명이 넘고 80만명의 난민이 생겼다. 쿠르드족에게 할랍자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비극의 대명사다. <거북이도 난다>는 전쟁고아가 된 소녀 아그린이 할랍자에서 이라크·터키 국경 마을로 피난오면서 시작된다.

쿠르드족 전쟁고아 위성에게 ‘USA’가 ‘오 꿈의 나라’인 것은 당연하다. 위성의 미국에 대한 호감은 쿠르드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대변한다. 실제 미국이 후세인을 ‘무찌르고’ 이라크를 ‘해방’시켰을 때, 쿠르드인은 쌍수들어 미군을 환영했다. 후세인의 학정에 시달려온 그들에게 미국의 승리는 쿠르드인의 해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라크 북부에서 쿠르드족 민병대는 미국을 위해 싸웠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영화의 초반, 쿠르드족 촌부의 입을 빌려 “이 모든 불행은 후세인 때문”이라는 대사를 슬쩍 끼워넣는다. 전쟁이 터지면 미군에 부역하는 쿠르드족을 후세인이 생화학무기로 또다시 공격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위성은 아그린에게 애정의 표시로 방독면을 구해준다. 생명줄을 건네는 사랑인 셈이다.

<거북이도 난다>는 미국이 나쁘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후세인이 어떤 학정을 저질렀는지 폭로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이들의 삶을 통해 미국을 비판하고, 후세인을 폭로한다. 아니 <거북이도 난다>는 굳이 비판하려, 폭로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쿠르드인의 눈으로 보면 진실이 보인다. 아그린의 부모를 학살하고 아그린을 강간한 사람들은 후세인의 군인들이었다. 아그린은 후세인 정권의 가장 철저한 피해자인 셈이다. 아그린의 멍한 눈빛은 보기만 해도 처연해진다. 하지만 미군의 해방도 아그린에게 구원이 될 수 없다. 위성의 사랑도 아그린의 부서진 삶을 복원시키지는 못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해방시키던 날, 아그린은 목숨을 끊고 위성은 다리를 잃는다. 해방군은 쿠르드족을 불행에서 해방시키지 못한다. 전쟁 고아들이 찾아야 할 것이 이제 미군 지뢰에서 후세인 동상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거북이도 난다>는 말한다. 그들의 불행 뒤로 미군의 행군이 이어진다. 미국을 좋아하던 위성은 미군에 등을 돌린다. 그저 부서진 전차의 잔해만이 쓸쓸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

폭력과 전쟁 그 자체가 악

<거북이도 난다>에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녹아 있다. 쿠르드인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선악의 쉬운 이분법을 넘어선다. 미국은 좋고, 후세인은 나쁘다는 이분법은 얼마나 편한가. 이라크 저항세력은 선이고, 미군 점령군은 악이라는 역논리는 얼마나 공허한가. 중동의 비극은 폭력이 악순환되면서,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비극은 처참한데 원인은 모호하다. 아니 이제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없다. 미국의 경제봉쇄가 원인이고 후세인의 학정이 결과인지, 후세인의 독재가 원인이고 미국의 침공이 결과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전쟁 상태라는 현실만이 삶을 압도한다. 부시와 후세인, 부시와 빈 라덴, 악과 악의 적대적 의존관계가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상생하는 폭력이 세상의 원리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원망할 대상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원망은 복잡하고, 분노는 모호하다. <거북이도 난다>는 정확히 그 정서의 핵심을 담고 있다. 아그린의 처연한 눈빛은 그 분노의 영화적 표현이다. 아그린의 눈빛은 처연하지만 아그린은 원망의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다. 원망이 가닿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날 중동(여성)의 비극이다. 그 모든 모순을 짊어지고 쿠르드인이 살아왔다. 후세인에게 학살당하고, 미국에게 배반당하면서 쿠르드인은 생존해왔다. 그렇다고 독립국가 ‘쿠르디스탄’의 건설도 폭력의 사슬을 끊을 대안은 아니다. 이라크 쿠르드족 정치조직인 쿠르드민주당(KDP)과 쿠르드애국동맹(PUK)은 후세인에 쫓기면서도 서로를 죽여왔다. <거북이도 난다>는 쿠르드 아이들의 삶을 통해 폭력의 선후는 없다고, 전쟁의 선악은 없다고, 폭력과 전쟁 그 자체가 악이라고 호소한다. <거북이도 난다>는 정말 탁월한 반전영화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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