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고백 할 것이 하나 있다. 어머 깬다. 라고 말해도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소년들이 좋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의, 어린 소년들에게 집착한다. 이 ‘유사 페도파일’ 증상이 나타난 건 꽤 역사가 깊다. 어린 시절 <태양의 제국>에서 영국식 교복이 너무 잘 어울렸던 또래소년 크리스챤 베일을 본 후 한 참 동안 꿈에 그가 나타날 정도로 정신을 못 차렸고, 그 이후로도 <빌리 엘리어트>의 제이미 벨로 이어지는, 틴에이저 소년들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사랑은 나의 노화와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성장을 거부한 채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 넥타이부대 아저씨들이 교복 입은 미소녀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해도, 나는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마이클 잭슨처럼 성적으로 농락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안심해시라!)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미처 알지 못하는 자들. 변성기의 고개를 넘기 전 소년만이 가지는 그 아름다움은 그 어떤 고혹적인 여인도 따라 올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들이 조금 후면 아주 거칠고, 둔탁한 '남자'라는 종족으로 변할 거란 사실이 늘 비극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그래서 아역 배우들의 성장을 심정적으로 못 받아 들이는 지도 모르겠다), 남자 냄새 물씬 풍기는 ‘마초 싸나이’ 배우들을 한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정신분석학 적으로 내 속 어딘가에 어른남자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간에 이 소년들에 대한 불타오르는 집착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건, 지난 겨울 BAM에서 열린 ‘루키노 비스콘티’ 영화제에서였다.
<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 이란 제목은 수 차례 접했지만 어쩌다 보니 토마스 만의 소설도, 비스콘티의 영화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 영화를 드디어 베니스 바다와 같은 넓디 넓은 스크린으로 보게 된 것이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던 음악가 구스타프는 리도 섬에 요양 차 머무르던 중 너무나 아름다운 한 소년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날부터 노구의 신사가 소년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순정의 세레나데가 시작되는데, 잿빛 같은 얼굴을 가졌던 이 남자는 소년의 엷은 미소 한번에 열아홉 소녀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가까이 말 한번 건네지 못한 채 호텔의 로비를, 레스토랑을, 베니스의 골목을, 리도의 해변을, 오로지 소년의 자취만을 찾아 헤맨다. 그리하여 그에게 소년의 가족이 점심 식사 후에 떠날 것이라는 호텔 지배인의 이야기는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다. 이 소년이 이제 몇 시간 후면 이 도시에 없다는 사실이, 세상 누구에게서도 받은 적 없던 그 미소를 다시는 못 볼 거란 사실이, 그에게는 다리를 잘라내는 칼보다, 심장을 관통하는 활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남자는 어떻게 해도 복원될 길 없는 젊음을 서글픈 화장으로 복원했다고 믿은 채 마음 속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바닷가에 앉는다. 태양을 반사하는 물빛처럼 반짝이는 그 소년을 쳐다보며 그 남자의 망막에는 잠시나마 찬란했던 젊음의 순간이 잡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운 날씨와 삶의 마지막 기운 때문에 노인의 얼굴은 이내 검은 먹으로, 붉은 연지국물로 얼룩지고야 만다.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고, 그렇게 남자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내내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구스타프의 시선에만 정물처럼 포획되었던 그 소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 소년은 이미 죽어버린 존재인 것이다. 한때 구스타프 안에서 신선하게 살아 움직였지만 이미 죽어버린 젊음, 그는 계속해서 그 유령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 사실 ‘페도필리아’가 아니라, 젊음이라는 시체를 살아있다 믿으며 주구장창 껴안고 뽀뽀하고 사랑하고 갈구하는 ‘네크로필리아’ 가 아니었던가.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그래, 이제 내 인생의 미소년들에게 안녕을 고해야 할 때가 아닐까, 가끔은 그들을 그리워하고, 또 바보처럼 갈망 할거란 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적어도 58%정도만이라도 내 안의 어른친구들을 사랑할 방법을, 나의 늙음과 어떻게 즐겁게 조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하고.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다시 그 못 말리는 취향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만난 그렉 아라키의 신작 <미스테리어스 스킨>때문이었다. (사람은 안 변한다. 쩝)
여기 두 소년이 있다. 도통 비슷한 것이라고는 없는 이 소년들에겐 돌이킬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평생을 바꾸어 놓은 어느 하룻밤의 사건이다. 잠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믿은 5시간의 기억.
어린 시절 야구부 코치에게 성적으로 이용당했던 소년들이 그 사건을 뒤로 어떻게 자라나는 가를 미스터리어스한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이 영화는 <노 웨어> <둠 제네레이션>같은 틴 에이져 퀴어영화를 만들어온 그렉 아라키의 최고 작일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 최고였다. B무비의 괴상한 취향을 덜어낸 자리에는 제법 묵직한 철학이 들어 앉았고, 길 떠나는 아이들은 더 이상 살해되거나 자살하지 않고, 그 문제가 시작된 지점으로 돌아와 서로를 껴안는다.
그나저나 아니나 다를까, 그 영화를 보곤 난 후 닐 역의 조셉 고든 루빗이 좀처럼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너무 아름답다’고 감탄 할 만큼 그는 정말이지 잊기 힘든 소년이었다. 이번 주말 정식으로 개봉된다고 하니 다시 봐야겠다며 상영시간을 체크하며 야릇하게 가슴이 떨리기도 했고, 야밤에 잠 안자고 검색 창에 그의 이름을 치고, <고인돌 가족> 시절의 사진을 찾아보며 “짜식 많이 컸네” 라고 흐뭇하게 웃기도 했다. (흠… 점점 이상한 여자처럼 보일게 틀림없다!) 그러던 차에 오늘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고 앞에 서 있는데 내 옆으로 두 소년이 다가와 섰다. 그냥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잠시 움찔해서 다시 그들을 보았다. 모자 티 위로 갈색 코듀로이 자켓을 입은 그 소년은 눈을 두 번 씻고 보아도 분명 닐이였다. 아니 영화 속의 그 소년, 조. 셉. 고. 든. 루. 빗.이였다. 생각보다 훨씬 작고 왜소했지만, 좀처럼 펼 생각이 없다는 듯 잔뜩 찌푸리고 있는 양미간의 긴장은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별 차이가 없었다.
사실 맨하탄에서 배우를 보고 호들갑을 떠는 건, 좀 많이 촌스러운 짓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도 많은 배우들이 이 도시에 살고 있고, 온갖 행사나 촬영으로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술집에서 잭 니콜슨을 만나도, 피자 집에서 사라 제시카 파커와 옆 테이블에서 앉아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 이 동네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이 떠나자마자 자랑하듯이 휴대폰으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겠지만!) 그러니까 누군가 17번가 7애비뉴 건널목에서 내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의 주연배우를 보았다고 호들갑을 떨 일은 전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건 좀 다른 경우다. 그건 단순히 영화배우 한 명과 스쳐 지나간 재수 좋은 날이 아니라, 몇 일 동안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던 한 소년과의 만남. 그러니까 영화와 현실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마법의 동굴 입구에 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입구의 돌을 열면 금새 매트릭스와도 같은 영화 속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 그렇게 찰나와도 같은 순간, 마음 속에서는 2십만 광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빨리 가서 인사라도 해, 팬이라고 말하기 쑥스러우면 영화 너무 잘 봤다라고 말해! ’ ‘아니야, 그냥 우아하게 지나가자’ ‘ 흠, 몰래, 사진이라도 찍을까?’ 이런 웃기는 자아들이 서로 아우성치는 동안 신호는 바뀌고 닐은, 아니 조셉은, 아니 그 동굴의 입구는, 그렇게 총총총 내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 도시는 이렇다. 가끔 마치 대본이라도 짠 듯이 상상하기 힘든 우연들을 안겨준다. 지하철에서 팔뚝 만한 쥐를 만나도, 집에 살고 있는 바퀴벌레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상태에 이르러도,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질퍽하게 싸놓은 개똥을 밟는다 해도, 어쩔 수가 없다. 기막힌 우연으로 가득한 이 도시를 사랑하지 않기란, 소년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만큼이나 상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