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진부하고 따분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19살 소녀 문근영은 ‘나무랄 데 없는’ 스타다. 이 표현이 스타에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문근영에게는 딱 맞는다. 예쁘고, 연기도 나쁘지 않고, 공부도 열심이고, 착하고, 성실하다. 심지어 그 나이에는 하기 어려운 기부와 선행을 끊임없이 베푼다. 스크린의 이미지와 일상생활이 일치해서 연예인의 살생부 X파일을 오히려 스타덤의 디딤돌로 만든 거의 유일한 배우다. 그러니까 감추고 싶은 소문이 무성한 연예계에서 뒷이야기를 미담으로 채울 수 있는 인물이 문근영이다.
‘미’가 아닌 ‘선’으로 스타가 된 배우
귀엽고 깜찍한 스타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점이 많다. 부모님 모두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기에 많은 여자 스타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곤 하는 소녀 가장이 아니다. 외할아버지가 좌파 통일운동가였다는 등등의 집안 내력과 광주 출신이라는 태생도 이제는 더이상 금기가 아니며, 오히려 한국 현대사의 비극 속에서도 맑고 건강하게 자라난 대견한 소녀로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더해준다. 오디션에 친구 따라갔다가 또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감독에게 발탁되었다는 그 흔한 연예계 신데렐라 입문기를 인터뷰에서 읊조리지도 않는다. 대신 탤런트가 꿈이어서 연기학원에 다녔다고 말한다. 완벽한 외모나 천재적인 재능이 아니라 대역부터 출발해 차근차근 연기실력과 자신의 이미지를 쌓아왔다. 이 당연한 과정을 생략한 것처럼 보이는 스타들과 달리, 문근영은 신데렐라 신화를 반복하지 않는다.
노력 끝에 재능을 발휘하고 스타로 성공했으면서도 인기가 떨어질까 조바심치기보다는 ‘정말 배우가 될 소질이 있는지’ 근심스러워 계속 연기를 할지 망설인다. 교양이 사라진 시대에 대학교의 교양 수업을 기대하고, 스타의 프리미엄을 활용해 대학을 선택하기보다는 인기없는 국문학과와 사학과가 좋다고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고 한다. 배우가 되려고 온몸을 뜯어고치고 스타 되기를 로또당첨처럼 열망하는 세태에도 불구하고 마치 언제든 미련없이 스타의 자리에서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돈에 미쳐버린 사회에 살면서도, 문근영의 부모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어린 딸이 돈을 많이 버는 걸 반기지 않으며 딸의 수입으로 부자가 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근영은 돈에 대한 집착이 없는 듯 수시로 거액을 기부한다. 촬영장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고, 출연결정에는 할머니와 엄마의 의견이 절대적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수많은 배우들 가운데 오직 문근영 단 한명만이 이런 식으로 설명된다.
사실 문근영을 흉내내기는 쉽지 않다. 문근영의 아름다움은 현실에서 실천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이미지의 힘을 빌려 더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근영의 모든 것들은 평범하며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람은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청소년은 하고 싶은 일에 따라 진로를 선택하고, 부모는 자식을 이용해 축재를 하려 해서는 안 되고, 일정한 부는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출연료를 선뜻 사회에 기부하는 스타와 자식이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인생을 망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스타의 부모는 매우 드물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을 문근영은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들이 총체적으로 한데 모여 문근영이라는 스타의 ‘분위기’(Aura)를 형성할 때, 문근영은 대한민국 스타로는 드물게 우리에게 ‘윤리적 숭고함’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문근영은 ‘미’(美)가 아니라 ‘선’(善)으로 스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주변 인물들에게 죄의식을 불어넣는 배우’가 되고, 따라서 ‘안티’를 걸기는 쉽지 않다.
‘국민의 여동생’, 그 기이한 판타지
되돌아보면 문근영은 비교할 만한 모델이 없는 스타다. 최진실처럼 귀엽고 깜찍하지만 그늘이 없고, 김태희 같은 모범생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세련되지 않고 소박하다. 여배우 지망생들이 제2의 전지현을 지향하며 형성한 자장권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손예진에서 한가인으로 이어지는 청순가련형도 아니다. 스타의 계보 속에서 친족관계를 찾기 어려운 현재의 문근영에게 딱 맞는 수식어는 ‘국민의 여동생’(SBS ‘야심만만’의 카피)이다.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 <연애소설> <장화, 홍련> <어린 신부> <댄서의 순정>에서 문근영은 계속 여동생으로 등장했다. 300여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어린 신부>와 문근영의 힘을 기대하는 <댄서의 순정>에서, 그녀는 여동생이면서 어린 신부가 된다.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 못하는 착한 손녀 보은은 16살에 억지 결혼을 하고(<어린 신부>), 댄스 스포츠 선수로 성공하려는 채린은 19살에 위장 결혼을 한다(<댄서의 순정>). 보은과 채린은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같이 살면서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지만 두 영화 모두 변변한 키스장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보은은 유부녀이기에 같은 또래 남학생과의 연애도 금지된다. 고등학교 1학년인 보은은 성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고 곧 20살 성인이 될 채린은 가짜 남편과의 성관계를 상상하며 무서워 벌벌 떤다. 그들은 섹스 상대가 아니라 업어주어야 할 귀여운 여동생이다. 그런데 사실 성적인 것은 그들이 아니라 문근영에게 금지된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신부>의 타이틀 장면처럼 그녀가 차라리 (웨딩드레스를 입은) 초등학생이기를 바란다.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결정적인 노래 <난 아직 사랑을 몰라>의 가사처럼, 아직(혹은 끝내!) 사랑을 모르기를 바란다. 미성년자에게 결혼을 강요한 다음 성관계를 금지하는 건 정말 기이한 판타지이다(칸트와 함께 사드를?). 여기에는 (한국사회에서) 어른이 되는 것은 곧 타락이라는 전제가 있다. 그래서 문근영 자신도 ‘어른이 되는 건 부담스럽고 순수를 잃는 것 같아 싫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아무도 그녀의(특히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스무살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같은 어른, 어른 같은 어린아이로서의 문근영을 좋아한다. 기이한 판타지 위에 스무살을 눈앞에 둔 문근영의 스타덤은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문근영은 아마도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아역스타 셜리 템플과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깜찍하고 귀여운 꼬마 셜리 템플은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기에 환상적인 춤과 노래로 피폐한 미국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줌으로써 스타덤에 올랐다. 십대 소녀 문근영은 오랫동안의 경제 침체로 고통스러워하는 한국사회에서 셜리 템플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문근영의 스타덤을 둘러싼 현상에는 좀더 다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최근 몇년 동안 한국영화는 과거를 다루면서 ‘기억’보다는 ‘추억’에 집착했다. 폭압적인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시대를 ‘순수의 시대’로 자리매김하면서 돌아가고 싶은 시절로 만들었다(<친구> <해적, 디스코왕 되다> <몽정기> <품행제로> 등등).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기억상실증이 유행이다. 남자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해 13살의 기억을 안고 깨어나거나(<봄날>), 여자주인공이 역시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18살 된다(<열여덟 스물아홉>). 청소년들이 주인공일 때 1980년대 한국사회의 다사다난한 현실이 지워지듯이, 주인공들의 정신연령이 더이상 어른이 아닐 때 드라마의 갈등은 수면 아래로 잠복한다. 한편에는 미숙한 인물들이 주인공인 드라마(<원더풀 라이프>의 철없는 부모, <불량주부>의 살림이 서툰 남자 주부, <신입사원>의 실력이 모자란 신입사원)과 문근영의 영화 <어린 신부>와 <댄서의 순정>이 있다. 그들은 기억상실증과 미숙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로 인해 잘못을 용서받고 책임에서 벗어난다. 보은과 채린도 결혼을 했지만 결혼한 어른으로서의 역할은 면제받는다. 그러니까 이 모든 현상이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건 유아상태로 퇴행하고 싶은 욕구이다. 어른으로서 해야 할 행동과 책임을 회피하고, 현실에 직면하지 않고 과거로 후퇴해서 변화를 피하려는 욕구이다. 아이들은 책임질 필요가 없으며, 여동생은 언제든 언니나 오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나쁜 어른이 되느니 착한 아이로 남으렴?
문근영은 결국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아이콘의 아바타이다. 이 아바타의 훌륭한 점은 선을 현실 속에서 자발적으로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녀가 계속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만, 어른이 되면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 염려하면서 그녀가 어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문근영처럼 살고 싶지만 비겁하게도 문근영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가짜 애인, 가짜 남편만 부여하면서 성숙한 어린아이로, 여동생으로 언제까지 우리 곁에 남기를 바란다. 문근영의 스타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한 <댄서의 순정>에서, 채린은 꿈꾸던 성공을 눈앞에 두고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녀 앞에 놓인 현실은 가혹하다. 채린의 남편 영세는 앞날의 불행을 예고하듯 (또는 성관계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듯) 끝까지 한쪽 다리를 전다. 채린과 영세의 불행을 초래한 인물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두 사람의 공간 밖에는 살벌한 정글이 버티고 있다. 영화는 채린을 기어이 그 속에 집어넣고 사랑이라는 숭고함을 빌려 희생을 강요한다. 채린이 순진한 옌볜 처녀이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이 리얼리티를 획득한다고 믿는다면, 문근영이 아직 (나쁜)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현실의 믿음이 영화로 전염된 것이다. 그렇게 문근영의 스타 이미지는 숭고함과 희생 사이에서 소비된다.
<댄서의 순정>의 결말은 스타 문근영 앞에 놓인 한계와 앞날의 불투명함을 예고한다. 채린은 착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미래의 기회를 잡지 못한다. 채린처럼, 문근영이 스타로 장식된 숭고함과 희생의 그물망에 포획되어 좋은 배우로 성장할 기회를 놓칠까 걱정스럽다. 문근영이 건강하고 성숙한 어른이 되고 ‘국민의 여동생’이 아니라 ‘국민의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녀와 함께 우리도 진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고 대리만족을 느끼며 소비하기를 그만두고 우리도 그녀처럼 밝고 건강하고 희망차게 살았으면 좋겠다. 스타라는 신기루만으로 갈증을 채우기에는 실재의 사막은 너무나 삭막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