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 신화’는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공동체로부터 독립된 임금노동자를 필요로 하며, ‘노동력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가정을 요한다. 노동자가 다시 노동할 수 있도록 육체적·감정적 휴식을 제공하고, 새로운 노동자를 산출하는, 즉 ‘쉼터이자 아기공장’의 역할 기구로서 ‘사랑으로 맺어진 (핵)가족’이 이상화된다. 이제 분리된 일터와 가정을 중심으로 성별분업이 강화되고, ‘연애->결혼’은 낭만적으로 특화된다(그외의 관계, 가령 동성간의 사랑이나 이성간의 우정은 금기시되거나 도외시된다).
그런데 모든 가치가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자본주의하에서 남성의 ‘돈을 받는 생계노동’은 가치화되지만, 여성의 ‘돈을 받지 않는 가사노동’은 무가치화된다. 이에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도 재정의되는데, 남성성은 ‘경제적 능력’으로, 여성성은 ‘남성에 대한 의존’으로 재규정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성애’란 생물학적 남녀의 사랑이 아니라, ‘경제적 능력을 지닌 남자’와 ‘순종적인 여자’의 결합이 된다. 근대정신분석학은 이를 ‘남근을 지닌 남자와 남근이 없는 여자’의 결합으로 해석하고, 근대문학은 지위/권력/재산/지식이 있는 남성과 출신은 비천하나 순진하고 순종적인 여성간의 사랑을 정형화한다. 역사적 구성물인 ‘낭만적 사랑’이란, 남녀의 권력적 차이를 전제로 한 역할극인 것이다.
‘댄스스포츠’는 특이한 예술 장르이다. 반드시 남녀가 한쌍을 이뤄 춤을 추며, 남녀의 동작이 다르다. 여성의 화려한 동작이 눈길을 잡아채지만, 동작을 리드하는 것은 언제나 남성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권력남 대 순진녀’의 이성애 역할극과 닮았다. 따라서 ‘권력남과 순진녀’의 결합을 양식화한 <신데렐라>나 ‘자유연애’를 꿈꾸었던 <자유부인>, 그리고 ‘이성애 신화’를 극단화한 <댄서의 순정>이 ‘댄스스포츠’를 소재로 삼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
‘이성애 신화’의 모든 것이 펼쳐진다
첫째,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와 그녀를 발굴하여 키우는 남자의 결합이다. 근영과의 관계뿐 아니라, 세영과의 관계나 다른 커플들도 마찬가지다. ‘댄서 김’도 여자를 발굴하여 스카우트하고, 출입국 직원도 조수-사수 관계이다. 여자는 백지상태에서 남자에게 선택받아, 남자에 대한 존경과 선망으로 열심히 훈련한 결과 선수가 되며, 남자가 그 능력을 잃거나 더 큰 능력을 지닌 남자가 나타나면 이월/양도된다. 그녀들은 가능성 외에 아무런 능력도 갖지 못하며, 심지어 남자의 개인적인 도움이 없으면 사회적 폭력과 매춘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근영은 의지할 곳 없는 채로 서울에 와서, 남자들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가리봉동 클럽에 팔린다. 그녀는 ‘누구의 애인이나 아내’라는 위치에서만 보호받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며, 그녀를 험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것은 남자의 사랑 혹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이다.
둘째, 모든 남녀는 궁극적으로 연인관계다. ‘댄스스포츠’의 두 남녀는 동료가 아니라 연인이 될 것을 감수하여야 한다. 근영의 언니는 선수로 남한에 초청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오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 때문에 춤을 저버린다. 근영도 춤을 일로 생각하기보다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세영처럼 그 남자하고만 춤출 수 있게 되어, 다른 남자와 춤추면서도 그를 그리워하다가 결국 ‘댄서’가 아닌 ‘순정’을 좇는다. 그들은 일과 사랑을 구분치 못하고, 사랑을 절대 우위에 둔다. 이러한 애정지상주의를 “삼류, 아마추어”라 지칭하는 것은 악당의 언어일 뿐이며, “반딧불이의 목숨을 건 운명적 기다림”이라는 근영의 언어를 통해, “진실 혹은 낭만”으로 격상된다. 낭만적 사랑이 신화가 되는 방식이다.
셋째, ‘이성애 신화’가 원래 ‘소설 쓰기’(‘로망스’의 어원이 같다)와 같은 허구적 과정이자 관객을 필요로 하는 역할극이라는 사실을 텍스트 내부에서 폭로한다. 경제적 필요에 의해 삭막하게 만난 그들이 첫 만남과 연애의 추억을 지어내고, 그 이야기를 공무원에게 들려주며 자신들이 감명받는다. 또한 이들의 역할극 전체 과정이 출입국 직원에 의해 관람되고 “사랑 맞다”며 추인된다. 사랑이란 ‘사랑 이야기’ 혹은 ‘사랑 가면극’을 통해 ‘자신과 남을 속이거나 속아주는 일’이라는 진실을 폭로하고야마는 것이다.
영화는 ‘능력있는 남자와 순진한 여자’의 구도를 극단화하고자 ‘옌볜’이라는 무공해 청정지역의 어린 여자가 연고도 없는 서울 땅에서 남자의 구원만을 바라는 상태를 설정하고, ‘댄스스포츠’의 양식을 통해, 모든 남녀관계를 잠재적 연인관계로 환원하려는 이성애 중심주의를 설파한다. <쾌걸 춘향>이 되지 못하고, ‘억지춘향’으로 내몰리는 난맥상을 ‘국민 여동생’ 문근영의 눈망울로 땜질하려 하지만, 지나친 내러티브는 오히려 그 모든 이성애의 과정이 실은 ‘성별화(gendered)된 가면무도회’였음을 역설적으로 폭로한다. ‘능력을 요구받는 남자’와 ‘내숭을 요구받는 여자’의 역할극에 관한 고찰은 <폭소클럽>의 <남녀본색>만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