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장 뤽 고다르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2005-05-11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버림받은 이유 혹은 그 다시 시작함에 대하여

(왕가위의 말을 빌려서)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이다. 혹은 그것이 <씨네21>이 지금 이 난을 마련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난을 맡기면서 (사석에서) 제일 먼저 한 말은 여기에 “꼭 영화에 관한 평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첨언’이었다. 그리고 난 다음 (공식적으로) 이 난을 소개하면서 <씨네21>이 걱정스럽게 덧붙인 말은 “이젠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듣는다”라는 더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의 환기였다. 절대적으로 구석에 몰린 상황. 그러니까 이 말을 하면서 시작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는 그것이 내가 여기 지금 첫 번째 영화로 장 뤽 고다르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로 시작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갑자기 모든 것을 중단하고 다시 시작한 경우를 알고 있다. 이를테면 루드비히 요셉 요한 비트겐슈타인. 혹은 (알튀세르에 의하면) 1857년의 마르크스. 그리고 물론 베르디. 또는 밥 딜런. 어쩌면 피에트 몽드리앙. 항상 피카소. 여기에 1979년의 고다르가 있다. 다시 제로로 돌아온다. 임당수 앞에 선 심청의 몸짓, 혹은 안티고네의 제스처. 그리고 그 다음.

시네마테크, 평론이 ‘일반’에서 멀어지는 까닭

첫 번째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잡지 <씨네21>의 두 번째 시작이다. 10주년을 맞이하고, 그 토대에서부터 시작해서 영화 저널의 환경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저널들은 1천원으로 경쟁에 나서고, 상당수의 독자들은 일주일을 기다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공짜’를 즐기면서, 점점 좁아지는 현실적이면서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잡지가 맹렬하게 다시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지난 4주 동안 거의 선언문에 가까운 남동철 편집장의 ‘Editorial’) 독자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금을 울리는 표현, “상상의 공동체”… 코뮌(commune).

두 번째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단지 장소를 옮긴 것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고 있는 시네마테크의 두 번째 시작에 대한 할 수 있는 최대의 애정을 담은 지지이다. 시네마테크는 박물관이 아니며, 도서관이 아니며, 전시회가 아니다. 말 그대로 영화관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들의 동시대성의 체험을 환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스콘티의 <레오파드>는 ‘문근영의’ <댄서의 순정>과,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은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과,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 혹은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는 류승완의 <주먹이 운다>와 ‘동시에’ 다루어져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 시대 영화들의 황량함과 빈곤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황량한 영화를 위해서는 담론이 넘쳐나는 동안 위대한 영화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영화에 관한 담론들이 빈곤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시네마테크를 영화관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영화들을 동시대의 체험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 비동시적 동시대성, 혹은 영화사의 영년(zero year).

세 번째 다시 시작한다는 것. 나와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하소연. 왜 우리는 버림받았는가? 왜 더이상 영화에 관한 글은 읽히지 않는가? 혹시 우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가? 비평이라는 것은 영화를 만든 쪽과 보는 쪽 사이의 (서로가 서로의 방식으로 견뎌온) 두개의 역사, 두개의 주관성, 두개의 삶, 두개의 태도, 그냥 한마디로 만드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대화의 활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백히 이 과정에서 한쪽으로 지금 기울고 있다. 우리는 재판관이 아니며, 해부학을 하는 의사들은 더더구나 아니다. 혹은 진리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 것인가?). 결국 영화에 관한 평이란 무엇인가? 그건 홍상수를 ‘홍상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김기덕을 ‘김기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는 박찬욱을 ‘박찬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괄호 안을 괴물이나 천사, 혹은 욕망이나 무의식, 또는 브레송이나 타란티노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전혀 다른 일이 된다. 우리는 질문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대답을 하거나 혹은 진단을 내리거나 검산을 마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사실상 영화라는 같은 법칙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만드는 쪽과 보는 쪽으로 나뉜 것이다. 그 역은 아니다. 위대한 영화를 쓸 때 우리는 위대한 생각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찮은 영화를 쓸 때 우리는 하찮아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위대함과 하찮음을 점점 구분하지 못한다. 혹은 하찮은 영화 앞에서 자기만 위대한 척한다. 눈이 멀어갈 때 점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때 이데올로기가 날뛴다.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해야 한다. 랭보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충고. “문자 그대로, 그리고 그 모든 의미로”. 우리의 배움, “보이는 그대로, 그리고 그 모든 의미로”.

고다르 스토리, 영화를 찍는다는 것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그리고 다시 한번 두 번째 다시 시작한다는 것. 여기 고다르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가 있다. 이 영화의 제목 <Sauve qui peut>는 갑작스러운 위기에 빠졌을 때 ‘할 수 있는 사람은 각자가 알아서 대피하라’는 체념어린 구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다르는 1967년, 혹은 그 이듬해 상업영화와 결별하였다. 그런 다음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장 피에르 고랭과 결성하고, 필름 대신 비디오를 선택했다. 그 영화들은 상업적인 배급망을 거절했고, 또한 아무도 배급하기를 원치 않았다. 고다르가 선택한 해방구는 그를 게토로 몰아넣었다. 그를 다시 상업영화로 끌어낸 사람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였다. 코폴라는 조에트로프 영화사를 만들고, 그런 다음 이 영화사에서 고다르가 할리우드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지 실험하고 싶었다. 고다르는 이 위험한 게임을 받아들였다. 고다르는 제목을 <더 스토리>(The Story)로 정했고, 주연은 로버트 드 니로와 다이앤 키튼이었으며, 촬영은 라스베이거스에서 할 예정이었다. 만일 코폴라가 <원 프롬 더 하트>에 손대지 않았다면 이 게임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미루어졌고, 고다르는 스위스에서 그의 두 번째 제로를 시작하였다. 두 번째 시작, 혹은 할 수 있는 자가 (알아서 자기 자신을) 구하라. 그것은 표류하는 시대에서의 조난신호이며, 구조에의 간절한 메시지이다.

고다르는 두 번째 시작을 하면서 영화를 보는 대신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고다르는 자막에 ‘고다르에 의해 작곡된 영화’(un film compose par Godard)라고 썼다. 실제로 영화는 종종 보는 것을 멈춰 세우고, 들리는 것에 집중하게 만든다(그리고 다시 돌아온 고다르는 60년대 자신의 스탭 중에서 오직 사운드 기사인 프랑수아 뮈지와 함께 일했다). 등장인물들은 대화를 나누다가 불현듯 질문한다. “지금 들리는 이 음악, 이게 무엇이지요?”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 음악이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짐작도 못한다. 영화는 마이너스 1의 메시지인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로 시작해서 제로로서의 “삶”(혹은 인생), 그리고 1로서의 “상상적인 것”, 2로서의 “공포”, 3으로서의 “비즈니스”, 그리고 4로서의 “음악”으로 나아간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예술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예술은 여성들의 것이다. 남자들은 네 번째 부분으로 아무도 넘어오지 못한다. 폴 고다르는 이 영역을 침범한 다음 차에 치어 죽는다. 고다르는 죽어가면서 중얼거린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인생은 결국 영화이다. 죽음을 맞이할 때 세상은 영화의 엔딩이다. 그러나 이혼한 아내는 딸과 함께 떠나면서 말한다. “자, 빨리 가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잖니.” 각자의 영화는 각자의 엔딩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영화는 다른 사람의 인생과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구원받았다고 기뻐하지 마라. 그것은 당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고다르는 (카이에의 친구들과 함께) 작가주의와 함께 시작해서 바르트가 작가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혹은 푸코가 작가, 당신은 누구냐고 질문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정치를 택했다. 그런 다음 다시 정치를 버렸다. 그것이 고다르의 두 번째 제로의 좌표이다. 그때 고다르에게는 영화만이 남아있다. 좀더 정확하게 고다르에게는 카메라와 붐마이크와 편집실과 녹음만이 남았다. 그것만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라고 물어볼 때 고다르는 자연스러이 앙드레 바쟁의 질문을 브레히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장 뤽) 고다르는 영화 안에서 (폴) 고다르를 빌려 자문자답한다. “왜 영화를 만드는가, 나는 바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를 만든다. 그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제 고다르에게서 영화는 사랑이며, 노동이다. 그러므로 고다르가 영화에서 선택하는 것은 그가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이며, 세상에서 노동하는 방식이다. 그가 30mm에서 40mm 사이의 렌즈를 선택할 때 고다르는 브레송이나 오즈가 50mm 렌즈를 선택하는 것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고다르의 말. 에두아르 마네는 35mm에서 50mm로 옮겨가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한 화가이다. 그것을 본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종종 고다르는 화면을 멈춰 세운다. 아마도 모두 촬영된 다음 편집실에서 옵티컬 프린팅으로 슬로모션처럼 처리된 장면들은 명백히 바르트가 지적한 푼크툼이다. 그 순간 흐르는 이미지가 멈칫거릴 때 고다르가 보고 싶은 것은 운동 그 자체이다. 그럼으로써 그 순간 우리는 드니즈가 아니라 비로소 자전거를 본다. 드니즈가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자전거에 관한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운동하는 자전거의 벡터를 멈춰 세우는 힘에서 온다. 마치 밀레의 그림이 회화 사상 들판에 선 골든 아워 시간대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지는 해를 멈춘 간절함에서 오는 것이다.

영화에 대해 쓴다는 것

이상하게 인상적이었던 장면. 폴 고다르는 드니즈에게 다가가 역에서 꼭 해야 할 말이라며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때 기차가 지나가면서 그들의 대화는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다. 하필이면 그때. 세상은 우리가 영화 보는 것을 방해한다. 세상은 대부분의 영화를 우리가 보는 것을 도와준다. 하필이면 그때 주인공이 도착하고, 하필이면 그때 경찰이 도착하고, 하필이면 그때 연인이 도착한다. 세상과의 조화와 불협화음 사이 그 어딘가에 영화가 놓여 있다. 영화는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그 던져진 우연과 놓여진 필연 사이에 놓인 우리.

그러므로 첫 번째 다시 시작한다는 것. 이 글은 표류하는 것에 대한 조난신호이며 구조의 메시지이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혹은 삶. 그런데 영화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고다르는 영화가 삶보다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랭보의 말을 빌려) 그 어떤 진짜 삶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그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삶의 대변자이다. 그 영화에 대해서 쓸 때 우리는 삶의 대변인으로서 증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이제 영화에 관한 글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씨네21>의 10주년을 맞은 호 바로 다음 그러니까 플러스 1호에 실리게 될 서문, 또는 10주년의 두 번째 시작의 첫 번째 책에 실리게 될 이야기, 세 번째 (혹은 정성일의 첫 번째) 전영객잔에서의 무한정 계속될 것만 같은 외로운 일기 끝.

일러스트레이션 김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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