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떨리는 가슴>을 20시간 동안 촬영한 뒤 잠깐 눈을 붙이고 나온 길이라고 했다. 예의 그 밝고 환한 얼굴을 기대했는데 조금 어두웠다. <질투는 나의 힘>을 찍고 난 뒤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아니다. 피곤한 탓인지 새침해 보인다. <질투는 나의 힘> 때보다 더 젊어 보인다고 했더니, 짧고 명확해서 대꾸하기조차 어려운 답이 돌아온다. 메이크업 했잖아요.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말투지만 거기엔 경쾌한 리듬과 동그란 원을 그리며 퍼지는 화사함이 있다. 마치 그의 얼굴처럼 말이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자 이내 얼굴엔 웃음이 번져나온다. 눈은 더욱 커지고, 입가엔 보조개가 팬 그이의 웃음엔 놀라운 기어전환의 마력이 있다. 일찌감치 찾아온 초여름 더위가 이 웃음으로, 기어이 싱그러운 봄의 한때로 되돌아간다. <질투…>의 원상이가 되거나 윤식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는 뇌종양을 앓는 아들의 엄마로 나온 신작 <안녕, 형아>와 자신의 작품세계, 그리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머뭇거리지 않고 거리낌없이 답을 들려줬다.
-우리가 아는 배종옥은 작가 노희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 렌즈를 통해 당신처럼 당당한 여자를 만났는데, 당신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며 섬세한 남자를 위해 마련된 판타지 같았다. 남자를 오히려 보호해줄 수 있는 여자랄까.
=내가 한때 그렇게 잘 나간 적이 있었구나 싶다. 난 남자팬이 없고 오히려 여자들이 더 좋아한다. 남자들은 나를 힘들어한다. 내가 자기 주장이 강해 보인다는 게 만들어진 부분도 있지만 내가 가진 부분도 있겠지. 어렸을 때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안 썼다. <행복어사전>이라는 미니시리즈에서 여기자 역을 하면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그래서 여자들이 자기 대변인이자 자신의 모델로 좋아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남자들이 좋아한다고는 생각 못했다.
-당신은 여성적이며 섬세한 남자는 안 좋아할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남자들의 애를 더 태울 것 같다.
=그들이 왜 나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가르쳐달라. 난 모른다. 남자 친구는 많다. 이제껏 해온 상대역 남자들이 다 잘해주고 존중해줬다. 난 남자다운 남자를 좋아한다. 물론 가부장적인 사람은 딱 싫고, 대화가 되는 사람이 좋다.
-벗는 게 싫어서 영화를 많이 안 했다고 했는데, 많은 이들이 보고 싶은 건 당신의 벗은 몸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연기하는 게 아닌가.
=제안이 온 영화엔 그런 장면이 꼭 있더라. 에로는 원하지도 않고 제의도 들어오지 않지만, 작품성 있으면 꼭 그런 장면이 있다.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새로 제안받은 시나리오에도 그런 게 있는데. 우리 세대는 (벗는 게) 자유롭다고 인식하며 자란 세대가 아니다.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텐데 힘드네. 갖고 있는 생각을 버린다는 게. 안 그런 배우들 보면 부럽다.
-<질투는 나의 힘> <안녕, 형아>, 그리고 또 다음 영화를 들어갈 예정이라는데 자주 스크린에서 보게 되서 반갑다.
=꼭 영화다 드라마다 구분하지 않고 일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은 작품이라면 무슨 상관인가. 영화, 멋있지. 좋은 작업이고. 드라마는 다양하게 얘기를 할 수 있고. 영화는 캐릭터 변화나 변신이 가능해서 더 좋지만. 여배우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는 충무로 영화가 없잖나. 써주는 것만도 고맙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배운 담배는 끊었나. 영화가 남긴 흔적은 사라졌나.
=내 딸이 보수적이다. 당장 끊으라고 하더라. 담배 피우는 사람 옆에도 있지 말라고 말이다. 이 영화로 내가 바뀌었다. 내가 너무 내 틀에 매여 살았구나, 때로 영화 속 성연처럼 내 인생의 한 부분을 혼돈 속에 두어도 되겠구나 싶었다. 부유하는 느낌으로 살아도 재미있을 것 같더라. 그래서 어느 한 시기는 그렇게 살려고 한다. 방치하고 내버려둬야 하는데. 그래서 작품 끝나면 길게 여행을 간다. 청바지 입고 길바닥에 앉아서 담배도 피우고 그런 삶을 꿈꾼다. 1998년 뉴욕에서 5개월을 아무것도 안하고 살았는데 거리를 걸으며 행복을 느꼈다. 힘들 때 그때 생각이 난다.
-정말 좋은 작품인데 일찍 잊혀졌다.
=좋아하는 사람만 보더라. 일주일 하고 내렸는데 그뒤로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에서 하루에 한번씩 상영을 했더랬다. 친구들을 우르르 데려갔는데 마침 그날만 안 하는 거라, 비는 퍼붓고. 작품 만든 김광수 대표 같은 이가 정말 돈 많이 벌어서 박찬옥 같은 독특한 감독들을 많이 배출하길 기도한다.
-<안녕, 형아> 시나리오를 택한 이유는.
=배우로 20년 됐다. 배우를 오래 한 이들은 사명감이 있다. 내가 추구하는 것도 있고 내멋대로 하는 것도 있지만 좋은 작품, 좋은 작업으로 사람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려는 사명감이 있는데, 이 생각이 시나리오를 고르게 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어떤 점을 잘해낼 수 있다고 믿었나.
=그런 거 없었다. 그런 좋은 작업에 내가 한 부분으로 동참한다는 의미였다.
-바라보기에 안타까운 연인이었는데, 너무 일찍 엄마가 된 건 아닐까.
=나는 왔다갔다 하고 싶다. 엄마라는 걸 부인할 수 없는 나이가 됐지 않았나. 엄마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은 별반 없다. 나이 안 들어 보인다고 해도 화면에 나이가 다 나오지 않나. 요즘 세대가 좋아져서 그렇지, 나 엄마 하는 나이다.
-머리가 아픈 큰아들 장한별(서대한), 말썽꾸러기 장한이(박지빈) 형제가 정말 아들처럼 느껴졌겠다.
=난 딸이 있지 않나. 지빈이는 붙임성이 있다. 엄마, 하고 부르며 착착 안긴다. 여자애같이. 대한이는 또 의젓하다. 그래도 아직 애여서 지빈이한테 내가 관심을 더 보이면 와서 애교부리고 그런다.
-아이들 데리고 밤샘 촬영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제까지는 내 이야기로 죽 가는 거였는데, 이번엔 받쳐줘야 하니까 너무 어렵더라. 내 얘기로 죽 가면 지도를 그릴 수 있다. 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라인을 정할 수 있고. 이번엔 아이 감정에 내가 맞춰야 하는데 처음이라 어려웠다. 서포트하는 배우가 이런 어려움을 겪겠구나 싶었다. 주연을 빛나게 하는 조연배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이 없지 않나.
-아이들과 찍기 어려웠던 만큼 보람도 크지 않았을까 싶다.
=아이들은 정말 예쁘더라. 내 딸 건강한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소아암에 걸린 아픈 아이들이 안쓰럽고, 그 아이들이 치료된다는 확신도 없이 수술을 몇번이나 받아야 하는데, 내가 힘이 돼줄 수 있는 게 없구나 싶었다.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같이 호흡하고 살아주는 거 밖에는.
-같은 처지인 한별이의 친구인 욱이 엄마 역의 오지혜와 화장실에서 울면서 세수하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괜찮았다. 그 장면 찍으며 얼마나 웃었는지. 의견충돌도 있었고, 조명으로 드러난 내 이마 때문에 웃기도 하다가. 조명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사실과 다르지 않으냐고, 화장실이 이렇게 어두워도 되냐고 지혜랑 나랑 감독한테 막 뭐라고 했잖아. (웃음)
-진심을 다해서 분노하고 슬퍼하는 어머니로 나왔다.
=어떻게 연기하겠다는 계획이 없었다. 영화가 아이들로만 갈 수는 없지 않나. 무게감을 실어줘야 하고 이야기의 타당성도 줘야 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감정의 톤은 그때그때 상의했다. 예전엔 철저히 준비하고 나갔다. 그게 중요했고 내 패턴대로 몰아갔는데 몇년 전부터 그게 아니다 싶더라. 현장에서 의견 나누며 내 생각이 아니라 하더라도 많은 것을 수용하면서 가는 게 훨씬 편하고 더 잘 표현될 수도 있다.
-감독도 신인이고, 배우들도 아이들이라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나.
=그랬다. 어떻게 풀어갈지 걱정했다. 자칫 슬픔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틀에 박힌 연출로 실화라는 것만 믿고 끌고 가면 어쩌나 싶었다. 촬영을 하면서 걱정을 놓았다. 감독이 믿음이 갔던 게, 집요하게 그리고 디테일하게 감정을 잡더라. 절대 그냥 안 넘어가고 제대로 감정을 뽑으려는 모습을 보면서 믿어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좋지 않은 조건 속에서도 한 걸 보면 시나리오의 미덕이 큰 것 같다.
=더 중요한 건 작품에 대한 사명의식이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가 좋은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한다.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작은 것들이 감동을 주고, 그 작은 희망과 꿈을 꾸면서 사람들은 하루하루 사는 게 아닌지. 그게 이 시나리오의 좋은 부분이 아닌가 싶다.
-최근 함께해온 감독이 모두 신인인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신인감독이랑 하면 미덥지 않은 게 있지 않나. 박찬옥 감독과는 <질투는 나의 힘> 하면서 참 좋았다. 그이는 사물의 이면을 보는 것 같다. 신인감독은 어설프지만 그만큼 철저히 준비해서 자기 색을 독특하게 표현할 수 있다. 신선한 시각도 있고 해서 재미있다. 이윤기 감독과는 TV문학관 <내가 살았던 집>을 같이 했는데 그와도 굉장히 재미있었다. 5월15일에 한다는데 무척 보고 싶다. 신선한 시각을 가진 사람과 만난다는 게 재미있다. 베테랑 감독과 할 때 편안함이 있다면 신인감독과는 설렘과 풋풋함이 있고, 거칠지만 진솔하다. 테크닉을 몰라 헤맬 때도 있긴 하지만.
-이번엔 분량이 많지 않다. 가족영화라기보다는 아이들 영화라고 할까, 아이들이 병을 경유하면서 성장하는데, 아이들만의 세계와 성장 방법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부모 역할이 커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는 게 중요했다. 시나리오에선 부모가 객관적이었다. 불만이 없었다. 시각을 어떻게 가느냐의 문제지. 찍으면서도 그건 감독이 할 부분이지 내가 상관할 게 아니었다.
-이젠 고아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거꾸로, 엄마에게 돌아갈 수 있는 아이들을 보며 오히려 엄마 생각이 날 수도 있었겠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없으니 천애 고아다. 진짜 왜 그렇게 슬프게 하는가. 잊고 있었는데. 엄마는 정말 중요하다. 우리 영화에 나오는 애들은 행복하다. 이렇게 큰 병이 걸리면 아이들과 부모가 헤어지기도 한다고 하더라. 경제적으로 힘드니까. 잘 낳고, 책임을 다해서 키워야 한다. 병원에서 뼈만 남은 아이를 봤는데 차마 볼 수가 없더라. 부모가 잘 안 오는 아이였는데, 아버지가 몇달 만에 찾아오니 의식이 살아났다더라. 말은 못하지만 그게 느껴지는 거다.
-로라 리니, 줄리언 무어, 헬렌 헌트, 조디 포스터보다 나이가 적거나 비슷한 연배다. 이들이 주연으로 활동하는 걸 보면 충무로의 편견은 큰 것 같다. 그러나 이윤기 감독 같은 개성있는 감독과 꾸준히 작업한다면 계속 영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에마 톰슨이 주연을 맡은 <위트>란 영화를 봤는데, 감동받았다. 얼마나 무게감 있게 끌고 가는지. 나도 괜찮은 배우가 되어야 할 텐데. <위트>도 그렇고 <클로저>도 그렇고. 인생을 아는 마이크 니콜스 감독 같은 이가 이제 우리에게도 나오지 않을까. 사실 내가 한창 일할 나이인데, 고령화 사회가 되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아지겠지. 이야기가 다양해지면 더 진중해지고 나이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시대가 그렇게 가지 않을까. 그래서 나이든 분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게 필요하다. 주5일제를 맞아 부부가 공유할 수 있는 문화도 필요하고.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면 상황이 달라질 것 같다. 그게 꿈은 아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