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낯설고 신비한 팜므파탈, <킹덤 오브 헤븐>의 에바 그린
2005-05-12
글 : 김도훈

프랑스 영화계는 핏줄에 의해 세습되는 왕정복고의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카트린 드뇌브와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의 딸인 키아라 마스트로이안니, 드뇌브와 로제 바댕의 아들 크리스티앙 바댕, 나탈리 베이와 조니 할리데이의 딸인 로라 스멧. 우리에게 낯설지만 그들에게는 익숙한 왕족의 계보도는 끝이 없다. <몽상가들>의 쌍둥이 남매인 루이스 가렐과 에바 그린도 배우의 피를 타고난 사람들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누벨바그 감독인 필립 가렐의 아들과 고다르 영화 <여자, 남자>의 히로인이었던 마를렌 조베느의 딸을 68혁명의 아파트 속으로 밀어넣었고, 이는 마치 혁명의 정신이 유전적으로라도 세습되길 꿈꾸는 노감독의 몽정기 같다. 그 속에서 에바 그린은 그레타 가르보였고, 마를렌 디트리히였으며 진 세버그였다. 동시에 순진한 미국 소년을 이상한 유럽의 세계로 데려가는 팜므파탈이기도 했다.

사실 에바 그린의 팜므파탈은 관능적이고 위험하다기보다는 부유한 사춘기 소녀처럼 제멋대로다. 실제로 에바 그린은 부족한 것 없는 중산층 가정에서 곱게 자란 소녀였다. 동화작가로 일하는 은퇴한 여배우의 딸이라면 차근차근 프랑스 코미디영화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5살의 에바 그린은 베르톨루치의 위험한 제안을 덥석 집어삼켰다. “엄마는 반대했지만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고나서 베르톨루치를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그 영화는 포르노도 아니었고 폭력적이거나 구역질나는 영화도 아니었다.” 에바 그린은 “마약에 취하거나 마취된 것처럼” 이자벨을 연기했고, <몽상가들>은 한없는 자유를 전해주었다. “나에게 연기는 치유다. 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 스크린 위에서 소리지르고 울고 웃을 수 있다. 연기는 흑마술이고 나는 몽상가이며, 그렇기에 영화란 나에게 완벽한 직업이다.”

너무나 프랑스인다운, 시적인 경구로 인터뷰의 말들을 직조하는 에바 그린은 <몽상가들> 이후 단 2편의 영화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프랑스 블록버스터인 <루팡>(2004)에 이어, 리들리 스콧의 신작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의 공주인 ‘시빌라’를 연기한다. 시빌라는 정략결혼한 상대를 숙청하고 연인 ‘발리안’(올랜도 블룸)을 왕위에 앉히려는 권력가이자, 상처받은 자존심을 자신과 도시의 파멸로 연장해버리는 여인이다. 에바 그린은 또다시 이방인을 유혹하는 팜므파탈의 매력을 진한 향수처럼 뿜어낸다. 비록 리들리 스콧은 시빌라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 발리안의 앞날을 축복하며 영화를 맺지만, 시빌라의 마지막 눈빛은 여전히 프랑스 시골에서의 삶 이상의 것을 꿈꾸고 있는 것만 같다. “돈과 명성을 위해 할리우드로 온 것은 아니다. 앞으로 데이비드 린치, 바즈 루어만, 폴 토머스 앤더슨과 미셸 공드리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젊은 프랑스 배우의 욕심이 시빌라의 눈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연기자의 핏줄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며, “일하지 않을 때도 캐릭터를 상상하며 내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산다”는 에바 그린은 할리우드의 공장 속에서도 꿈꾸듯이 자신을 내던질 몽상가다.

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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