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에서 달랑대는 ‘NO SMOKING’ 표지가 무색하다. <사랑니>의 23회차 촬영이 한창인 부천의 한 패스트푸드점은 더위에 달아오른 스탭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김으로 후끈거렸다. 통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볕도 따가운데 에어컨까지 고장이다. 하지만 여기가 사막이건 남극이건 아랑곳없는 커플이 있으니 천천히 다가드는 최현기 촬영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그들은 김정은과 이태성이다. 실루엣으로 어른대는 근경의 사람들 너머로 홀로 햇빛을 받는 그들의 테이블은 모니터 속에서 작고 행복한 섬처럼 보인다. 지금 영화 속 시간은, 서른살 학원교사 조인영이 첫사랑과 이름도 얼굴도 똑같은 제자 이석과 햄버거를 먹으며 데이트하는 늦은 봄날의 오후. 언제나 인영이 속한 어른의 공간에 소년이 찾아가곤 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인영이 소년이 속한 공간을 방문했다.
인영과 석에게 Y자 이어폰으로 음악을 나눠 듣게 연출해놓고 정지우 감독이 좋아한다. “<라붐>하고 똑같죠?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하하하!” 다음 컷은, 인영과 동거하는 고교 동창 정우(김영재)가 주차딱지가 붙은 인영의 차를 보고 가게로 들어섰다가 다른 (어린) 남자 앞에서 눈부시게 웃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는 장면. 짧은 시간에 정우가 통과하는 감정은 복잡하다. 약속없이 마주칠 생각에 들떴다가, 망연하고 슬퍼졌다가, 다시 짐짓 상냥한 얼굴을 회복하기까지. 이 신에서 영화가 정우의 얼굴을 응시하지 않는다면 배우가 꽤나 서운할 것 같다. 게다가 오늘은 김영재의 첫 촬영이다.
같이 사는 남자친구에게 어린 연인을 들킨 여자는 당황할까, 뻔뻔할까? 정지우 감독과 김정은이 상의 끝에 OK 컷으로 선택한 감정은 “속없이 좋아하다 들킨 민망함”이다. “좋아죽는” 건 영화 속 인영만이 아니다. 슬픈 듯도 기쁜 듯도 한 이야기, 비련도 주책도 아닌 캐릭터, 섬세한 감독 때문에 고민이 한둘이 아닐 듯한데, 김정은은 인영이와 <사랑니>가 좋아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어떤 이미지로 비쳐질지, 영화가 성공할지 안 할지 상관 안 할 정도로 현장에서 느낌이 좋고 행복하다. 그러다보니 주연으로서 현장 분위기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도 까맣게 잊고 그저 즐기고 있다.” 이 편안함이 그녀가 이전에 연기 변화를 시도했던 <나비> 등의 작품과 <사랑니>가 갖는 차이다. “그때는 변화를 시도하면서도 두려움이 있었다. <사랑니>는 그게 없다. 내가 이런 취향인데 여태 못하고 살았구나, 이러다가 다른 것을 또 어떻게 할까 싶다. 지금까지 작품 함께한 분들이 오해하실까봐 조심스럽지만 더 낫고 더 못하고가 아니라 그냥 좀 다르다.”
정우가 끼어들어 생성된 삼각구도는 금세 허물어진다. 여유로운 연적의 등장에 분통터진 석이 자리를 박차고 있어났기 때문이다.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이태성은, 이석의 쌍둥이 형제 이수도 동시에 연기한다.(공교롭게도 그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쌍둥이 구천서 선수로 분했다.) 지금까지 줄곧 이석이었던 이태성은 이수의 첫 촬영분을 앞두고 궁리가 많다. “이수가 좀더 착하고 부드러운 아이라는 설정이지만, 착하게 말하고 착한 행동을 한다고 부드러운 사람인 건 아니잖아요.” 가까이 보니, 여드름인 줄 알았던 붉은 자국은 분장으로 만든 상처다. “이게 뭔 줄 아세요?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석이는 방금 수학선생 동거한다고 떠드는 애들이랑 싸우고 온 거라고 감독님과 정했어요. 이 상처가 정우를 봤을 때 감정이랑 연결되는 거죠.” 젊은 배우는 득의양양하게 소곤거린다. 달래러 쫓아온 인영에게 석이 짜증을 부린다. 소년의 불타는 질투에 김정은의 눈이 행복감을 가누지 못해 더욱 초롱초롱해진다. 상대방보다 자신의 판타지에 취한, 아직 떫은 맛이 깃들지 않은 사랑의 첫 나날. 온종일 창 밖에서 돌아가던 바람개비도 부러움에 넋을 잃고 멈추어 있었다.
정지우 감독 인터뷰
“사랑은 아프지만 모두 갈 만한 길이다”
-<해피엔드> 이후 정말 오랜만의 현장이다. 기분은.
=나는 대학에서도 영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영화를 안 찍고 산 기간이 없었던 것 같다.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조인영 역의 캐스팅을 설명한다면.
=김정은씨를 만나기 전에는, 과장된 연기인데도 보는 이를 믿게 하는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건 진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랑니>의 연기는 그처럼 믿게 만드는 본질은 같은데 도구가 달라진 거다. 여러 가지 생각을 안에 품은 연기다.
-김정은의 캐스팅으로 인해 영화가 변화한 면이 있는가? 러브신에도 변화가 있나.
=촬영을 하면서 배우들의 작용으로 조금씩 달라져간다. 지금의 인영은 원래의 인영과 김정은씨의 중간쯤 되는 여자다. <해피엔드>를 만들 때 최초의 의도는 어쨌든 배우가 입는 상처를 보고 불편했었다. 감정의 본질은 유지하지만 표현방식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관객이 그녀의 영화라면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기대할 텐데.
=<사랑니>에서 김정은은 거의 웃지 않는다. 웃음이 있다면, 코미디를 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좋은 사람이고 낙천적인 사람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석/이수 역의 오디션에서 어떤 것을 요구했나.
=이태성씨는 사나이다운 연기를 요구하자 비누로 머리감고 뻗친 머리를 하고 나타났고 다시 슬픈 상황을 주니 30분 시간을 달라고선 돌아와서 가슴 아픈 연기를 보여줬다. 신인이지만 이제 스탭들이 그의 연기를 믿고 기다려준다.
-해피엔딩인가.
=(힘차게) 물론이다. 사랑은 아프지만 모두 갈 만한 길이라고 말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