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나에게로 가는 길, <추방된 사람들>
2005-05-17
글 : 문석
나의 뿌리를 찾아, 정체성을 찾아, 좀더 원초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미래를 찾아, 알제리로! 알제리로!

모든 여행은 나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했던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낯선 길,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자연 ‘나는 누군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게 마련이다. 파리에서 알제리까지의 5000km를 자동차와 배와 두 다리에 의지해 가는 <추방된 사람들>의 주인공 남녀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날 불현듯 알제리행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남녀는 이 긴 여정이 스스로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지 못했겠지만. 사실, 연인인 자노(로맹 뒤리스)와 나이마(루브나 아자벨)가 무료함을 떨치기 위한 여행의 행선지로 알제리로 잡은 건 뜬금없는 일만은 아니다. 자노의 조부모는 알제리가 프랑스 식민지이던 시절 이곳에서 반식민 운동을 펼쳤고, 나이마는 알제리 출신 부모를 두고 있다. 결국 원하지 않더라도 이 여행은 그들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 될 게 자명하다.

그러나 이 뿌리찾기는 단지 부모나 조부모를 향한 그것만에 머물지 않는다. 남녀는 스페인의 황량한 한 지방에서 알제리에서 왔다는 소년과 소녀를 만난다. 좁은 걸음을 보채며 친척이 살고 있다는 파리를 향해 유럽 대륙을 오르고 있는 두 아이에게 남녀는 파리의 지인을 소개해주고, 아이들은 남녀편에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맡긴다. 이 짧은 만남은 100년이 넘는 식민지배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노예처럼 생활했던 알제리인들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불법체류자 단속 경찰의 시선을 피해 트럭 밑바닥에 매달려 떠나는 소년과 소녀의 애처로운 모습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현현한다. 어쩌면 소년과 소녀는 자노와 나이마의 ‘집단적 과거’를 비추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또 자노와 나이마가 알제리에 도착한 뒤 봇짐을 진 난민행렬을 만나는 장면은 이들이 향하는 곳이 단지 알제리가 아니라 지난한 역사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어딘가로 향하는 수많은 이들과 어깨를 스쳐가며, 남녀가 반대방향으로 힘겹게 거슬러올라가는 장면은 고통의 역사를 품으려는 개인들을 문학적으로 묘사한다. 알제리 출신 소년과 소녀의 집에서 평안함을 느끼며 지내게 되는 것 또한 이들의 알제리행이 불가항력에 의한 일이었음을 결과론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부모의 고향 또는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 한바탕 눈물을 쏟는다 한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그들이 여전히 파리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 젖어 있다면 알제리로 간다 해도 그건 젊은이라면 한번쯤 거쳐야 할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파리에서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세비야로, 카르보네리아로 그리고 지중해를 건너 튀니지에서 다시 알제리로, 그리고 목적지인 알제까지 향하는 험로 역정은 이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초현대도시에서 차츰 황량한 들로 접어드는 자노와 나이마는 원초적인 욕정에 이끌리기도 하고, 접해보지 못한 공동체 속을 부벼야 하며, 자두농장에서 과실 따기를 하는 등 원시적 노동을 접하기도 한다. 남녀가 수풀 안에서 벌거벗고 뛰놀 때 이들은 근원적인 어떤 존재를 향해 속살을 드러내며 자신의 영혼 안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난 어딜 가든 이방인이었다”라며 알제리계 프랑스인 나이마가 스스로를 깨닫게 되는 것도 이 길 위에서다.

이들의 내면 흐름에 따라 음악 또한 달라진다. 어쩌면 음악이 이들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건지도 모른다. 프랑스 고층 아파트에서 팍팍한 도시 고속도로를 바라보며 이들이 듣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는 외부의 소음과 자아를 차단하기 위해 억지로 귀에 밀어넣는 음악처럼 들린다. 세비야에서 듣게 되는 여가수 마카티나의 플라멩고 음악은 이들의 육체가 억누르고 있던 욕망과 관능을 끄집어낸다. 알제리로 넘어가면 격렬하고 원초적인 아프리칸 리듬이 남녀를 맞이한다. 가쁜 심장박동 같은 이 음악은 이제 영혼 안에 억눌려 있던 무언가를 건드려 터뜨려버린다. 이 폭발적인 리듬과 함께 신비로운 수피교의 의식이 치러지는 마지막 대목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집약돼 있다. 앞의 90분은 15분가량의 이 롱테이크를 위해 존재한다 할 정도로 여기서 자노와 나이마는 자신을 벗어버린 무아지경의 세계로 돌입한다. 고난의 과거사와 함께 아프리카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흡수한 두 사람은 이 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안전한 여행> 등 이른바 ‘집시 3부작’을 만들었고, 이 영화로 지난해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던 토니 갓리프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개인사를 담아냈다. 어릴 때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이주해온 그는 영화 속 나이마처럼 알제리어를 할 줄 모른다. “나는 세 가지 다른 세계의 혼합물이다. 프랑스의 정신을 이해하는 입장이며, 집시 방식으로 생각하고, 아랍의 영혼을 갖고 있다”는 갓리프는 43년 전 고향에서 떠나온 길을 영적으로 되짚어가듯, <추방된 사람들>을 감성과 역사성으로 충만하게 채웠다. 그는 “세상의 모든 추방된 자들을 위한” 이 영화를 통해 “다양한 출신 배경과 여러 요소가 융합된 문화를 가진 새로운 세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토니 갓리프 감독

소년원생이 저명 감독이 되기까지

<안전한 여행>
토니 갓리프

지금까지 14편의 장편영화와 1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토니 갓리프는 1948년 알제리의 외딴 마을에서 태어났다. 영화에 대한 꿈은 그가 알제리에 있던 시절 학교에서 시작됐다. 그의 교사는 16mm 영사기를 사서 매주 장 비고, 존 포드,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여주고 토론을 벌였다. 1960년대 초반 가족이 있는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로 갔을 때, 그는 무일푼이었다. 거리를 떠돌며 비행을 저지르다가 소년원 신세를 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그는 한 영화관을 숙소로 삼게 됐고, 1966년의 어느 날 당대 최고의 배우 미셸 시몽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촬영 중이던 시몽의 분장실로 무작정 들어갔고 시몽은 그를 에이전트에 소개시켜준다. 시몽 덕분에 연기학교에 들어가게 된 갓리프는 5년 뒤 무대에 서게 됐고, 자신의 소년원 시절을 떠올리며 첫 시나리오 <분노의 주먹>(La Rage Au Pong)을 쓰게 된다. 1975년에는 첫 장편영화 <몰락의 시작>(La Tete en ruines)를 만들었다. 3년 뒤에는 프랑스계 알제리 정착민과 네딸이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그린 <어머니의 대지>(La Terre au ventre)를 만든다. 독일 적군파의 리더 안드레아스 바아더에 매료됐던 그는 마음속으로 바아더를 지지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단 준 첫 영화는 1983년의 <Les Princes>였다. 파리 교외에 정착하기로 한 집시들에 대한 이야기인 이 영화는 평단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훗날 ‘집시 3부작’이라 불린 연작의 첫 번째 작품으로 자리매김됐다. 이어 파니 아르당 주연의 사랑영화 <울지마요 내 사랑>(Pleure Pas My Love, 1989)과 사회풍자코미디 <가스파드와 로빈슨>(1990) 등을 만든 그는 ‘집시 3부작’의 두 번째 영화인 <안전한 여행>(Latcho Drom, 1993)을 만든다. 그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을 받은 이 다큐멘터리는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루마니아 출신 집시들이 인도, 이집트, 터키, 루마니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프랑스, 스페인을 돌며 공연하는 모습을 담았다. 1997년에 만든 <Gadjo Dilo>는 루마니아에서 한 집시가수를 찾아 헤매는 프랑스 남자의 이야기로 ‘집시 3부작’의 마지막 편에 해당한다. 이 영화는 로카르노, 브뤼셀, 세자르 등 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해 몬트리올영화제에서는 그의 ‘집시 3부작’에 특별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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